여행 해외
교토 광륭사 목조미륵반가유상
만선생~
2025. 2. 4.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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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륭사 목조미륵반가유상
자주 통화하던 재일교포 3세 여성이 있었다.
민족의식이 투철해 여느 재일교포 3세와 달리 한국말도 완벽하였다.
그래도 현지인 한국에 살지 않기 때문에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은 있었다.
특히 역사적인 것들과 결부해 말하면 무슨 말이냐며 되물었다.
교토에 있는 조선학교를 나왔는데 나를 역사 선생님으로 초빙하고
싶다는 얘기도 했다.
주로 사용하는 언어가 일본어다 보니 일본 사람 비슷하게 발음을 했는데 그 점이
오히려 더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코로나 끝나 일본에 가면 한 번 만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소식이 끊겼다.
한 참 뒤 무슨일이 있나 전화를 했더니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남자친구가 생기고 얼마지 않아 번갯불에 콩구워먹듯 결혼을 하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그 뒤론 연락할 일이 없어 완전 소식이 끊겼다.
그렇게 재일교포 3세 여성과의 인연은 만나보지도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한데 기억나는 게 하나 있다.
학교에서 단체로 일본 국보 1호인 광륭사 목조 미륵반가유상을 보러갔다는 것이다.
미륵반가사유상이 한반도에서 건너왔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나 역시 미륵반가유상을 직접 뵙고 싶어 버킷리스트에 적어두었다.
일본에 가면 반드시 보리라 하였다.
5년여 만에 다치 찾은 교토!
광륭사는 빠질수 없는 코스였다.
그래서 아침 숙소를 나서 코류지(광륭사)가는 버스를 탔다.
이윽고 코류지 앞이다.
버스에서 요금을 내고 내리려는데 기사가 무슨말을 뭐라뭐라 하는 것이다.
일본 말이라 알아들을 수 없는데 버스를 내릴 때 사전에 버튼을 눌러야 한다는 걸
말하는 것 같았다.
아. 맞다.
한국에서도 그랬지.
'도마리마스' 버튼을 눌러야 했던 거다.
코류지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니 100미터 쯤 걸어 코류지 정문이 나왔다.
문앞에 전봇대와 전선이 얼기설기 얽혀 이곳이
그 유명한 광륭사가 맞나 싶었다.
문 안으로 들어가니 지금까지 다녔던 교토의 여느 절들과 달랐다.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입장료는 청수사, 금각사, 은각사의 두 배인 1,000엔을 받았다.
우리돈으로 만원 쯤 하는 것이다.
들어가니 여느 절들에서 보았던 금당같은 것도
없이 '영보전'이란 콘크리트로 지어진 전시장이 바로 나왔다.
사진 촬영금지.
어두컴컴한 전시실에 노인네 두명이 지키고 서 있었다.
헤이안시대부터 무로마찌막부 카마쿠라막부시대까지 이어지는 불상들이
화려하기 그지 없었다.
알고보니 모두 국보였다.
이 것만으로도 충분한 볼 거리다.
그리고 마침내 일본 국보 1호인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 나왔다.
신라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꼭 빼닮은 반가사유상!
아쉽게도 반가사유상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반가사유상 앞으로 제단들이 있어 그 거리가 어림잡아 6미터는 돼보였다.
멀찌감치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연 그 감동도 살아나질 않았다.
2m만 줄여도 느낌이 훨씬 살아날텐데...
미륵은 먼 미래에 나타나실 부처님이다.
그 때엔 중생의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극락세계가
펼쳐질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 같은 부처님이 이생에 출현해주시길
갈망하며 빌었다.
동네 어귀마다 세워져 있던 미륵부처들은 고통받는 중생들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있다.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을 만든 이의 바람도 이와 같을 것이다.
전시장을 둘러보는데 관람객은 나말고 여성 한 분이 전부였다.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청수사나 은각사와 너무나 달랐다.
절은 전시장 외엔 이렇다할 볼 거리가 없었다.
일본인들이 사랑해마지 않는 쇼토쿠태자(聖德太子)가
절을 지을당시만 해도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했는데 메이지시대 폐불훼석을
당하여 이렇게 작아졌다고 한다.
절을 나오며 기념으로 쇼토쿠태자가 그려진 그림을 한 장 샀다.
1,000엔 우리돈으로 만원 쯤 하는데 좀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한 흑백 인쇄물일 뿐인데 그렇다.
다음 다음날 오미하치만시 있는 죠메이지(長命寺)란 절을 갔더니 역시 쇼토쿠
태자가 세웠다고 한다.
쇼토쿠 태자는 일본의 기틀을 다진 이로서 불교를 공인했을 뿐 크게 중흥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