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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조선 왕릉 답사기

만선생~ 2024. 7. 10. 12:22
 
 
 
 
 
 
나의 조선왕릉 답사기

 

소풍가는 날은 수업이 없었다.
다른 말로 공부를 안해도 되는 날이었다.
어디로 떠난다는 것에 대한 설레임보다
지긋지긋한 숙제로부터 벗어난다는 해방감이 더 컸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소풍 장소는 동구능과 태능으로 항상 정해져 있었다.
아마도 학교가 은평구 쪽에 있었으면 서오릉이나 서삼릉으로 소풍을 갔을 것이다.
학교를 졸업해선 소풍 갈 일이 없었다.
당연 왕릉도 갈 일이 없었다.
삽십대 초반인
밀레니엄 첫해, 나는 서울에서 밀려나 경기도 화성으로 이사했다.
참으로 황량한 곳이었지만 멀지않은 곳에 왕릉이 있어 위로가 되었다.
정조와 사도세자가 뭍힌 융건릉이다.
융건릉의 원찰인 용주사도 융건릉과 함께 가볼만한 곳이었다.
나는 먹고 살기 위해 수원에 있는 인력사무소에 나가 일당잡부로 일했다.
그러던 어느날 뜻하지않게 이틀 연속
융건릉으로 가 낙엽치우는 일을 하였다.
점심은 왕릉사무소가 있는 재실에서 먹었다.
솔직히 그 때까진 재실이 뭘하는 곳인지도 몰랐다.
그냥 수월하게 이틀연속 일당벌이를 했다 싶었다.
다음 해엔 화성을 떠나 인근도시인 오산으로 이사했다.
삶은 여전히 팍팍했지만 나름 변화가 있었다.
변두리의 작은 평수, 그나마 대출금이
반을 넘었지만 내 명의로 된 아파트에 입주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차를 산 것었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 했다.
누군가의 소개로 소개팅이란 걸 했는데 만남 장소가 서울 강남이었다.
정해진 수순으로 카페에서 함께 커피를 마신 뒤 갈 곳을 찾았다.
선정릉이 눈에 띄였다.
기억은 나지않지만 왕릉을 둘러보고 선정릉 숲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던 거 같다.
아쉽게도 내가 여자마음에 안들어했는지 만남은 더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태종 이방원이 뭍힌 헌인릉은 도곡동에 있는 새만화책이란 출판사에 다녀오며
가보게되었다.
그 무렵이었나보다.
왕릉을 한번씩 다 가봐야겠단 생각이 든 것은.
그리하여 중고등학교 시절 소풍을 갔던 동구릉을
다시 찾았다.
태조 이성계가 뭍힌 그곳.
동구릉은 처음부터 동구릉이 아니었다.
이성계가 뭍힌 건원릉 이후 서울 동쪽에 능이 하나씩 늘어가면서 동삼릉. 동오릉 동칠릉
그리고 동구릉으로 이름이 변화해 나간 것이었다.
서삼릉과 서오릉도 마찬가지였다.
동구릉 서삼릉 서오릉을 돌아보니 능이 무려 열일곱개였다.
공순영릉을 합하니 스물이 되었다.
2013년 오산을 떠나 의정부로 이사온 뒤에도 왕릉답사는 계속되었다.
북한산 자락의 신덕왕후 강씨가 뭍힌 정릉,
경종이 뭍힌 한예종 안 의릉,
단종비 송씨가 뭍힌 사릉,
중종반정으로 하루아침에 왕비에서 서인이 된 단경왕후 신씨의 무덤 온릉,
문정왕후와 그의 아들 명종이 잠든 태강릉, 세조와 그의 비 정희왕후가 잠든 광릉,
황제릉으로 조성된 고종과 순종의 홍유릉을 차례로 가보았다.
폐위된 왕들의 무덤도 찾았다.
북한산 시루봉 아래 있는 연산군묘와 남양주에 있는 광해군 무덤에 가 권력의
허망함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세종대왕이 뭍힌 영릉에서 효종이 묻힌 영릉으로 넘어가는 길은 왕릉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길로 기억된다.
인조가 잠든 파주 장릉은 공릉천하구를 돌아보는 길에 가보았다.
조선 왕릉 가운데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영월 장릉은
단종이 유배된 청령포와 함께 돌아보았다.
남한에 있는 조선왕릉은 모두 40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왕릉은 모두 대동소이하다.
봉분과 석물 그리고 왕릉을 관리하는 재실 마지막으로 이를 둘러싼 숲으로 구성돼 있다.
왕릉은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종9품 벼슬인 참봉의 지휘아래 수십인이 일하였다.
어쩌다 나무 한그루가 말라죽으면 엄격하게 문책을 당했다.
'나이 칠십 참봉 벼슬에 임금거동 스무여덟번'이란 말이 있다.
왕릉관리가 그만큼 어렵단 이야기이기도 하다.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건설되고 유지된 왕릉.피지배 계급 입장에선 불살라버려야 마땅하지만
이 땅의 백성들은 그리 모질지 못했다.
일제 또한 조선왕릉을 차마 훼손할순 없었다.
개발광풍도 비켜갔다.
덕분에 도심 한가운데 지금과 같이 아름다운 숲으로 남았다.
만약 이마저도 없었다면 얼마나 황량할 것인가!
나의 왕릉답사는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이 뭍힌 김포 장릉 한곳을 남겨두게 되었다.
하지만 일부러 시간을 내 갈 순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 갈 일이 생긴 것이다.
이곳서 김포장릉은 차로 30분거리.
드디어 왔다.
여느 왕릉과 마찬가지로 숲이 아름다웠다.
참봉과 그 아래사람들이 생활하던 재실 또한 품격이 있었다.
이렇게 고풍스런 곳에서 살고싶단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연지가 아름다웠다.
물위에 떠있는 연잎을 보노라니 절로 마음이 정화되었다.
주차장도 숲속에 파묻혀 뜨거운 열기를 차단해 주었다.
북한산 둘레길과 한양도성 일주를 마쳤을 때 뿌듯했었다.
조선왕릉도 마찬가지다.
내가 나고 자란 이 땅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졌단 생각이 든다.
앞으로도 쉼이 필요할 때마다 조선왕릉을 돌아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