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모님이 우리 나이로 구십에 돌아가셨다.
몸이 불편하여 평생을 기지개 한번 크게 켜지 못하고 떠나신 거다.
장례식장에 가 사촌형께 (이모님 아들)인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53년 전쟁의 폐허 속에 태어났는데 그나마 일찍 아버지( 이모부)를 여의였다.
어린 나이 몸이 불편한 어머니(이모)를 모시고
살아야했으니 그 고생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그런가운데서도 어린 사촌 동생들에게 용돈을 주곤했다.
어린 날 방학을 맞아 거여동에 있는 이모님 집에서 한동안 지냈었는데 형은
퇴근길에 과자를 한아름 사가지고 오는 것이었다.
덕분에 먹고싶은 과자를 실 컫 먹을 수 있었다.
어느날 이모님집에 놀러가보니 낯선 여자가 들어와 있었다.
형수님이었다.
그 땐 전화가 없던 탓에 아무 연락없이 거여동 가는 572번 버스를 타고
찾아가곤 했었다.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땐 그랬다.
그 날 난 신혼방이란 걸 처음 보았는데 베틀이 방을 다 차지하고 있었다.
형수님이 가져온 것이었다.
세월이 흘러 어느날 이모님 댁을 갔더니 베틀이 보이지 않았다.
있어야 할 물건이 없으니 뭔가 허전했다.
형이 형수님을 만나게 된 것은 함께 일하던 동료의 소개를 통해서였다.
형은 거여동 인근 공장에서 판금 일을 했고 형수님은
파주 법원리에서 옷감을 만드는 공장에 다녔다고 한다.
형수님은 공장에서 베틀로 옷감을 짰단다.
그러다 형을 만나 거여동에서 신방을 차리게 되었다.
그 때 가져온 것이 베틀이었다.
오늘 장례식당에서 형수님께 들으니 비단실로 기모노 옷감을 짰다고 한다.
기계가 아닌 손으로 다 짰다는 것이다.
그렇게 옷감을 짜놓으면 회사에서 차를 보내 가져갔다는 이야기다.
기모노를 만드는 일본 회사에서 인건비가 싼 한국에 일을 발주하는
이른바 OEM 생산 방식이다.
베틀은 회사 소유로 일을 그만둘 때 가져갔다고 한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일을 했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하지만 이제와 그 모습을 재현하는 건 불가능하다.
사진이 남아 있으면 좋을텐데 그 런걸 사진으로 남겨놓았을 리는 만무하고.
기억하건데 조선시대 베틀의 모습은 아니었다.
철로 돼있었던 것 같다.
산업혁명 시기도 아닌 1980년.
옷감을 기계가 아닌 손으로 일일이 짰다는 것이 신기했다.
비하인드 스토리.
살림을 살기 시작했지만 방이 없어 3개월동안은 이모님 형 그리고 형수 셋이
한 방에서 생활했단다.
역시 지금으로선 생각할 수 없는 이야기다.
결혼식은 조카가 태어난지 몇 년뒤에야 올렸다.
복이 많아서인지 조카들이 공부를 잘했다.
다들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해 장가들을 갔다.
형내외가 손주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며 까르르 웃는다.
상계동에 있던 아파트를 최고점에 팔아 의정부 호원동에 있는 아파트를
무릎 아래 가격에 사서 살고 있다며 좋아했다.
지독히 가난했던 이들이 가난의 질곡에서 허우적거리지 않고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모두 돌아가신 이모님 덕이 아닐까 싶었다.
2023.2.26
'만화 작업 > 정가네소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고향사람 김형진님 포스팅 (1) | 2025.04.11 |
|---|---|
| 아버지가 남긴 시 (1) | 2025.02.27 |
| 정가네소사 '여자삼대' (0) | 2025.02.15 |
| 정가네소사 글씨 (0) | 2025.02.11 |
| 큰형수 (2) | 2025.0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