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월 예산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길을 잘못 들어 이리 저리 헤매었다.
그 때 마침 눈에 들어온 게 윤봉길 의사 생가 푯말이었다.
1932년 4월 29일 홍커우 공원.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 행사에 폭탄을 터트려 일본군 고위 장성
몇을 죽였으니 일대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지지부진하던 상해 임시 임시정부는 극적으로 살아났다.
장개석 정부의 도움을 받아 광복군을 창설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당시 윤봉길 의사의 나이는 스물 넷.
꽃다운 청년이었다.
고향엔 처와 어린 자식 둘이 있었다.
다행히 시간을 다투는 일이 없어 생가에 들렀다.
생가는 두 곳으로 나뉘어 있는데 걸어서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정확한 주소지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덕산은 1914년 시군구 통폐합 이전엔 어엿한 한 개 고을이었다.
윤봉길 의사 집안은 시골에서 밥 술 깨나 먹고 살았던 것 같다.
그렇다고 어엿한 양반은 아니어서 지붕이 기와가 아닌 볏집이었다.
위인들이 대개 그렇듯 윤 의사는 어릴 때부터 무척
총명했고 한학과 신학문을 모두 공부했다.
특이한 것은 일찍부터 민족 의식에 눈을 떴다는 거다.
그리하여 고향에서 계몽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거사 직전 윤봉길 의사의 행적은 김구 선생이 쓴 백범일지에 자세히 나와 있다.
김구 선생과 시계를 바꾸어 찬 일은 너무나 유명하다.
몇 달 전 오마이뉴스 김종훈 기자가 쓴 <항일로드 2000km>
를 사서 읽었는데 윤봉길 의사의 마지막
가는 길이 자세히 기술돼 있었다.
죽음을 앞두고도 너무나 당당했던 윤의사.
이후 국립 중앙 박물관에 가 윤의사가 두 아들에게 보낸 친필 편지를 보았다.
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윤의사 생가를 둘러보는 내내 가슴이 뭉클했다.
아쉬움도 있었다.
윤의사가 살았던 당시 건물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모두 복원한 건물이었던 것이다.
대충대충 흉내만 낸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았다.
특이한 점은 윤의사 생가가 위치한 곳이 섬이라는 것이다.
크지도 않은 물줄기가 갈라져 섬이 되었다.
섬 한 가운데 윤의사 생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섬이 아니다.
하천을 대대적으로 정비해 물길을 하나로 내어버렸다.
2025.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