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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작업/정가네소사

어떤 기다림

by 만선생~ 2023. 12. 19.

 
 
2012년 출간한 정가네소사 1,2,3권은 애초 외할머니를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려 했었다.
하지만 하다보니 외할머니는 중심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외삼촌 얘기도 두어 컷으로 살짝 다루었을 뿐이다.
언제 다시 외할머니 이야기를 그릴지 모르겠지만
만화에서 다루지 못한 아쉬움을 글로 대신해본다.
세꼭지로 구성했는데 여기 글은 첫째 꼭지다.
혹 길어서 읽을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제목 어떤 기다림
 
 
어느 해 국가 장학금을 받을 일이 있어 상세 가족관계 증명서를 떼게 되었다.
내 어머니 김정숙.
1937년 10월 15일 생.
가족 사항엔 부 김병옥과 모 오연하가 주민등록 번호 없이 쓰여 있었다.
이는 두 분 모두 1968년 주민등록제도가 생기기 이전 돌아가셨음을 의미한다.
나는 서른 몇 살까지 외가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한 번도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삶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어머니께서 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셨다.
비록 무명의 만화가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어떠한 형태로든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글은 이 같은 생각에서 써내려간 짧은 기록이다.

1 외할머니 오연하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이 바라다 보이는 땅 김제.
삼한시대 수리시설인 벽골제가 흔적으로나마 남아있는 김제는 행정구역상
전라북도에 속한다.
현지 말로는 징게 맹개 외배미들이라고 하는데 김제 만경의 넓은 들이란 뜻이다.
어머니의 고향이자 나의 고향이기도 하다
경기도에 살고 있는 나는 이따금 볼일이 있어 호남선 열차에 몸을 싣고 김제 역을 지나친다.
수구초심일까?
함열, 황등, 익산을 지나 와룡에 이르면 나도 모르게 차창 밖으로 눈길을 준다.
특히 김제 역을 지날 때면 나도 모르게 한 번도 뵌 적 없는 외할머니의 모습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떠오르곤 하는 것이다.

외할머니는 1955년 김제역과 그리 멀지 않은 신풍리 (소라단) 자택에서 어머니 나이

열여덟 되던 해 위암으로 돌아 가셨다.

당신이 돌아가실 무렵 외가의 살림은 넉넉지 않았다.
아니 돌아가시기 이십 년 전부터 살림이 외할아버지로 인해 급속히 기울기 시작, 급기야 당신이
직접 생활 전선에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당신께서는 다른 여느 아낙네들처럼 남의 집 품팔이를 하지 않았다.
“이문만 나면 천리를 마다하고 가는 게 우리 장사치들이고만 요.”
시집오기 전 외할머니는 대청마루에서 친정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는 어느 상장사의 말을 들었다.
“흠... 짐이 무겁지 않은가?”
“견딜 만 합니다요.”
상장사는 지게에 상을 가득 짊어지고 하루 백리 이상을 걷는다고 하였다.
“덕분에 식구들 밥 굶기지 않고 그럭저럭 살아갑니다요.”
이어 흥정만 잘하면 하루 사이 천금을 벌 수 있는 게 또 장사라고 하였다.
“그래 천금을 벌었는가?”
“아이구. 천금을 벌었으면 지가 이렇게 이 무거운 걸 지고 여기까지 왔겠습니까요?”
너스레를 떨며 웃는 상장사의 목젖이 유난히 커보였다.
상장사가 떠난 뒤 외할머니는 상장사에게서 산 호족반을 바라보았다.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상이었다.

그 같은 기억 때문일까?

외할머니께서 선택하신 것은 장사였다.
자본금이 없기에 김제 황산면에서 면서기를 하고 있는 남동생 수갑을 찾았다.
수갑은 전주에 있는 전주고등보통학교를 2학년까지 다니다 일본인 선생과 트러블을 일으키며
학교를 그만두었다.
일본의 식민지배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달리 먹고살 방편이 없어 면서기 노릇을 하였다.
머리엔 도리구찌를 쓰고 양복바지엔 각반을 차
사람들은 멀리서 보아도 수갑임을 금세 알 수 있었다.
함께 전주고등보통학교를 다녔던 이가
“그래 왜놈 똥구멍이나 긁으며 사는 게 그리 좋으냐“고 비아냥거리자 면상에 바로 주먹을
날려 코뼈를 부러트려 놓기도 하였다.

“아휴... 매형은 참 그 많은 재산을 다 어찌하고 누님을

이리 고생시킬까?
그러게 허파에 바람만 잔뜩 들어가지고...“
수갑은 자기도 살기 힘들다는 지청구를 늘어놓으며 얼마간의 돈을 내놓았다.
외할머니가 부끄러움에 고개를 떨구고 수갑의 집을 나서는데 수갑은 주머니 속에서 3원을
따로 꺼내 건네 주었다.
“애들 ‘바람떡’이라도 사주구려.”

아무리 서운해도 믿고 의지할 곳은 동기간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원평에 시집가 살고 있는 여동생에게도 신세를 졌다.
여동생 남편은 유학으로 이름 높은 간재 전우의 제자였다.
유학에 뜻을 두었지만 이미 간재가 세상을 떠난 뒤라
살아생전 스승으로 모시지는 못하고 문하생들이 남아있는 계화도에 들어가 몇 년을 공부하였다.
원평에 돌아와 살면서도 항상 경전을 옆에 두고 읽었다.
그러나 시속엔 밝지 못하여 재물을 모으진 못했다.
대대로 내려오는 얼마간의 논과 밭을 일구며 생활을 해나갈 뿐이었다.
“처형 잠깐만 기다려 보시구려.”
여동생 남편은 원평 장터에서 가장 큰 싸전으로 가 얼마간의 돈을 빌렸다.
“고맙습니다.”
“고맙긴요. 동기간에 돕고 살아야죠.”
돈을 받아드는 외할머니의 눈에선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돈 꼭 갚겠어요.”

김제 역에서 열차를 타고 외할머니가 향한 곳은 익산 역이었다.

역에서 내려 가장 번화한 본정통(本町通)을 찾았다.
본정통! 이른바 혼마찌엔 일본인 상인들이 자리를 점하고 있지만 중국인 상인들도 지지 않을 새라
한 구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들어오기 한 참 전부터 장사를 하였다고 한다.
결속이 굳건하여 아무리 총독부의 비호를 받는 일본인들이라도 상권을 모두 장악하지는 못했다.
‘山東布木(산동포목)’이란 간판을 달고 있는 포목점은 산동 출신 중국인이 운영하는 가게다.
주인인 왕대인은 2대에 걸쳐 장사를 하고 있는 백발의 늙은이로 호복차림을 하였다.
외할머니는 여느 장사치들이 하는 흥정이란 걸 몰랐다.
물건을 받자 달라는 대로 물건 값을 모두 내었다.
세상은 서로가 서로를 속고 속이는 야바위판!
닳고 닳은 장사치들만 보아온 왕대인으로선
놀라운 일이었다.
이 조선인 여인을 보호해주고 싶었다.
왕대인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지니고 있던 성냥을 한 갑 외할머니에게 건네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난 신용을 목숨보다 귀하게 여긴다 해.
눈금을 속여 파는 일은 절대 없다 해.“
“예?”
“물건 많이 팔아 불처럼 일어나라 해. 그래서 함께 잘 살아가자 해.
그래서 왜놈들을 몰아내자 해 ”

 

왕대인께 성냥을 받아든 외할머니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내가 돈을 벌면 그 덕에 돈 버는 사람이 또 있다는 걸.
일제 강점기. 조선 사람은 너나할 것 없이 가난하였다.
비단포목을 사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옷감을 전혀 안 해 입고 살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이 마을 저 마을 돌다보면
어느새 머리에 가득 이고 있던 비단포목이 줄었다.
비단포목을 팔기만 하는 것은 또 아니었다.
바느질이 서툰 이에게 바느질을 가르쳐주기도 하고 때에 따라선 돈을 받고 옷감을 지어주기도 했다.
 
장사는 수입이 일정치 않았다.
공치는 날도 많았다.
일단 비가 오면 장사를 나가지 못했다.
“고맙다 비야. 그런데 난 이 조그만 텃밭 말고는 가진 게 없으니 어떡하니.”
외할머니는 처마 아래로 떨어지는 빗방을 보며 잠시 과거에 대한 회한이 밀려왔으나
이내 정신을 차리며 말하였다.
“부산아 옷 벗으렴. 정모 너도”
반지고리에서 바늘을 꺼내 실을 꿰었다.
이어 아이들의 헤진 옷을 바느질하였다.
집에 방이 세 개 있어 두 개는 세를 주었으나 세만 받아선 생활이 안 되었다.
이러다 아이들이 굶주려 죽을 판이었다.
외할머니는 한 참을 망설인 끝에 반닫이를 열었다.
 
한산하기 이를 데 없는 지금 김제와 달리 일제 강점기 김제는 늘 사람들로 붐볐다.
호남 제일의 곡창지이기도 하고 금광 열품으로 광업소가 즐비했다.
외할머니는 어느새 김제 본정통(혼마찌)를 걷고 있었다.
외할머니의 발걸음이 항한 곳은 ‘전당포(뎐당포 典當鋪)’였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전당포인데 일본말로는 시찌야 (質屋しちや)라고 했다.
조선인이 운영하는 전당포가 없기에 그리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당포엔 조선인이고 일본인이고 급전이 필요하여 물건을 잡혀가는 사람이 많았다.
사금광을 운영하던 외할아버지 또한 이곳에서 회중시계를 잡혀 돈을 꿔간 것이 여러 번이었다.
그리하여 보기만 해도 미운 마음이 드는 곳!
그러나 제비새끼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미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치였다.
시집올 때 해와 잔칫날 말고는 입어 본 적이 없는 삼회색 저고리와 비단 치마.
저고리는 자주 빛 고름이 참으로 고왔다.
치마는 색실로 학을 수놓아 더욱 아름다웠다.
여자의 옷을 왜인 그 것도 남자에게 맡긴다는 것은 커다란 수치였다.
그럼에도 옷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기레이네(아름답다)~~ 릿빠나데스(훌륭하다)~~~”
전당포 주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감탄사를 연발했다.
“고고 (여기)”
 
외할머니는 쓰린 마음으로 전당포 주인이 건네주는 얼마간의 돈을 받았다.
목숨과도 같은 돈.
그 돈으로 아이들에게 해먹일 쌀을 샀고 불을 지필 수 있는 땔감을 샀다.
두부를 비롯한 찬거리도 함께 샀다.
그리고 다시 비단포목을 이고 길을 떠났다.
“썩을... 니그머니(니 어머니)가 배운 게 그 것밖에 더 있다냐?”
 
술에 취한 아버지가 우리들 앞에서 어머니를 향해 하는 말이었다.
장사밖에 할 줄 아는 게 더 있냐는 것이었다.
그랬다.
어머니는 외할머니를 통해 장사를 배웠다.
돈 버는 일엔 의지도 없고 수단도 없었던 아버지.
자격지심에 술은 갈수록 늘었고 늘상 집안을 시끄럽게 하였다.
이런 아버지를 두고 어머니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서울이었다.
모로 가도 서울로 가라하지 않던가!
간이역인 와룡역에서 밤 9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온 어머니는 용산 역에서 내려 동대문
평화시장에 이르렀다.
언제나처럼 새벽공기는 쌀쌀했다.
어머니는 늘 그랬듯이 계단으로 건물 2층에 올라 의류 도매점이 줄지어 늘어선 복도를 걸었다.
"아이고 김제댁 어서 오시오"
황해도 연백이 고향이라는 연백 상회 아줌마가 어머니를 반갑게 맞았다.
"새로 들어온 물건은요?"
"보시오. 어제 들어온 물건인데 디자인이 기막막히오.
이 땡땡이 문양에 넘어가지 않을 여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오. "
 
진한 이북 말이 정겨웠다.
물건을 다 고르고 값을 계산한 어머니는 연백상회 아줌마가 타주는 커피를 마셨다.
설탕을 몇 스푼이나 넣었는지 아주아주 달았다.
덕분에 피로가 확 달아났다.
어머니는 다시 새벽기차를 타고 김제 와룡으로 내려왔다.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잠시 쪽 잠을 잔 뒤 이 동네 저 동네를 돌았다.
김제뿐만 아니라 열차를 타고 시댁이 있는 순창까지 갔다.
도시와 멀리 떨어진 산골이라 옷을 사가는 여인들이 많았다.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저런 장사 끝에 선택한 것이 바로 옷 장사였다.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80년대.
뻣뻣하기 이를 데 없는 칫솔조차 들고 나가기만 하면 팔리는 시대였다.
어머니 역시 그 같은 시대의 흐름에 힘입어 옷 장사 몇 년 만에 그 동안 진 빚은 물론
얼마간의 돈도 모을 수 있었다.
결국 아버지가 사업을 한다며 그 돈을 모두 까먹고 적지 않은 빚까지 지게 되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