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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단상

공모전

by 만선생~ 2025. 7. 3.
90년대 말 LG와 동아일보사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만화 공모전이 있었다.
상금이 얼마였는지 기억 안 나지만 만화 공모전으론 인지도가 높아 도전하는 이가 많았다.
그 무렵 나는 장편 만화를 그릴 엄두는 못내고 단편 만화에 집중했다.
발표매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스토리도 어쩌다 하나 씩 떠올라 일 년에 한두 편 그리는 게 다였다.
어쩌다 데뷔는 했지만 활동을 제대로 못하는 만화가!
그렇게 어정쩡하게 세월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나는 경마에
미쳐있는 친구 경일이와 대화를 나누던 중 이야기 하나가 떠올라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제목은 ‘확률의 게임’.
지하철 입구에서 동냥하는 거지와 경마로 전 재산을 날린 사내가
우연히 만나 경마장에서 대박을 터트린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이야기의 끝은 경마에 빠진 사람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경마꾼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다시 경마장으로 향한다.
나는 오랫동안 힘들게 완성한 만화를 LG 동아 공모전에 냈다.
대상까지는 아니라도 최소한 입상정도는 할 것이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루는 내 사는 곳에 오신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애비도 꼭 될 거라고 생각한다”
원고를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입상을 자신하는 아버지가 경솔해 보였지만
자식을 응원하는 마음만큼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입상자 명단 어디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상금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려던 나의 계획은 무산되었고 아버지에겐
떨어졌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나의 첫 단행본인 “정가네소사”는 처음 계획과 달리 아버지가 주인공이었다.
책을 읽고 난 이들은 등장인물 중 아버지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정가네소사는 2013년 부천만화대상에서 우수만화상을 받았다.
대상이 아니어서 아쉬웠지만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생각에 위안이 됐다.
올 들어 산업통상부와 한국만화영진흥원에서 공모하는 제작지원 사업을
각기 하나씩 모두 냈는데 모두 떨어졌다.
산업통상부 쪽은 후배와 같이 내 후배는 붙고 나는 떨어졌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쪽은 좋은 평가를 받긴 했는데 제출한 분량이 너무
적어 탈락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공모전에 작품을 많이 낸 건 아니지만 떨어질 때마다 내상을 입는다.
늘 있는 일이라며 아무렇지 않은 듯 지나치려해도 어느 순간 우울한 기분이
엄습한다.
승리의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패배의 기억을 안고 살아간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살아계신 어머니께 작가로서 성취를 보여주고 싶다.
그런데 그 길이 아직도 멀게만 느껴지니 마음이 약해진 것인가?
아무튼 길은 멀어도 걷지 않을 수 없으니 걷는다.
느린 걸음이지만...
 
2017.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