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를 그리는데 결정적 한계에 봉착한 것은 스토리였다.
누구는 할 이야기들이 넘쳐난다고 했지만 나는 할 이야기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스토리 작가를 찾아갔지만 그들이 건네 준 스토리는
적이 실망스러웠다.
그릴 마음이 전혀 나지 않았다.
만화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뭔가 그리긴 그려야 하는데 뭘
그려야 할지 참으로 막막했다.
그 때 생각해 낸 것이 경쟁자가 별로 없는 4컷 만화였다.
짱돌이란 반항적인 성격의 아이가 주인공이었다.
선생에게 부당한 소리를 들으면 몰래 선생차를 긁고 마는 아이!
짱돌은 강팍해질대로 강팍해진 당시 나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캐릭터였다.
마침 공모전이 있어 스무개 정도를 만들어 냈는데 수상자 명단에 내 이름은
없었다.
다음에 생각해 낸 것은 패러디 만화다.
진지한 극화체를 버리고 만화 특유의 표현을 가미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그린 것은 배트맨의 우리말 버전인 박쥐맨이다.
범죄의 도시 고담에 나타난 박쥐맨.
박쥐맨은 악당들로부터 시민을 구하고 얼마간의 사례비를 받는다.
좀 치사하지만 박쥐맨에겐 나름 사정이 있었다.
박쥐맨의 부모는 죽기 전 집사에게 빚을 졌다.
남아있는 유산은 오로지 집 한채인데 빚을 갚지 않으면 그마저도 넘어가게
생겼다.
그래서 박쥐맨은 위험을 무릅쓰고 밤마다 범죄의 현장을 누비는 것이었다.
12쪽에 걸쳐 박쥐맨을 그린 뒤엔 빽투더퓨처를 그렸다.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갔는데 아버지는 바람둥이 사기꾼이고
엄마는 뚱뚱하고 못생겼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매달리고 아버지는 물욕과 본능사이에서 갈등한다.
여성의 시각으로 보면 비난받을 소지가 있지만 난 내가 쓰고 그린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다음은 터미네이터였다.
학급비를 빼돌려 맛있는 걸 사먹는 말구에게 할리데이비슨을 탄 거구의
사나이가 나타난다.
사나이는 미래에서 널 구하려고 왔다며 어서 뒤에 타라고 한다.
영문을 몰라하는 말구와 어디선가 들리는 총소리.
액체 금속으로 된 T-1000에 쫓기고 쫓기어 몸을 숨긴 곳은 공사중인 건물!
터미네이터는 자신을 수리하며 말한다.
자신은 미래에 네가 너를 살리기 위해 보낸 로봇이라고.
좀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말구는 미래에 사기꾼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안긴다.
피해자들은 어린 시절의 말구를 죽여 사기피해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그래서 보낸 것이 액체 금속 로봇 T-1000이다.
나는 쪽팔림을 무릅쓰고 작은형에게 원고를 보여주었다.
원고를 넘겨보던 작은 형이 재미있다고 한다.
나는 형의 말에 고무되어 공모전에 냈다.
짱돌의 전성시대와 마찬가지로 수상자 명단엔 내 이름이 없었다.
잡지사에 가 원고를 찾아오는데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화끈거려 계단을 뛰면서 내려왔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나를 지배하는 것은 관성이었다.
공모전에 떨어졌지만 원고를 더 이어가야 할 것 같았다.
수퍼맨과 엑스칼리버 스토리를 쓴 뒤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 스토리를 썼다.
수퍼맨과 엑스칼리버는 다음에 그리기로 하고 먼저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를 그렸다.
콘티를 짜고 데셍을 하고 펜터치를 하고 스크린톤을 붙이고...
고생스럽게 12페이지를 그렸는데 문득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결국 이 건 내 이야기가 아니지 않나?
나는 만화에 소질이 없음을 깨닫고 만화를 포기했다.
1998년에서 99년 무렵 이야기다.
이후 나는 만화를 전혀 보지 않았고 눈에 띄여도 애써 외면했다.
나는 그렇게 6년동안 만화를 떠나 생활 전선에 서 있었다.
201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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