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60413530001549
"'장길산' 원고, 대충 쓰느니 펑크 내라더라"...한국일보와 함께한 황석영의 반세기[특별 인터뷰]
1974년 서른두 살의 청년 소설가 황석영이 한국일보의 서울 종로구 중학동 옛 사옥을 찾았다. “신인 중의 신인”이었던 그가 차기작으로 준비하
www.hankookilbo.com

황석영이 밝히는 장길산 연재 10년
◎“장기영社主 집한채값 자료비 선뜻”/술값으로 모두 써버려도 집필실까지 지원/해남서 광주서 제주도서 인편으로 텔렉스로 원고전송/한국일보가 없었다면 장길산 완성 못했을것한국일보는 명작의 산실이었다. 한국일보의 연재소설사는 곧 한국문학사였다. 특히 74년 7월11일부터 84년 7월5일까지 10년동안 2,092회나 연재된 「장길산」의 완성은 한국일보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창간 44주년을 맞아 작가 황석영(黃晳暎)씨와 화가 최연석(崔然石)씨의 글을 함께 싣는다.
벌써 햇수로 24년이나 흘러갔다.
1974년에 나는 서른두 살의 젊은이였다. 그 해에 낳은 딸이 이미 대학도 졸업하고 시집갈 나이가 다 되었으니 실로 한 세대 전의 일이 된 셈이다. 그해 3월에 나는 첫 창작집 「객지」를 출판한 직후였다. 「장길산」에 대한 구상은 72년 가을부터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당시 「문학사상」의 대표를 맡고 있던 이어령(李御寧) 선생과 연재에 대한 의논이 있었다.
자료를 수집하는 동안에 장길산의 집필계획이 대담이나 인터뷰를 통해서 알려지기 시작했고 한국일보 문화부에도 알려져 연재 권유를 받게 되었다. 아직은 준비가 덜 되었노라고, 자료도 채 모으지 못했고 조선후기 사회에 대한 연구도 불충분하다며 고사하였으나, 이영희(李寧熙) 문화부장이 충분한 시간과 지원을 해주겠다며 사주에게도 보고를 드렸다고 해서 백상(百想) 장기영(張基榮)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선생은 나와 함께 여러가지 자료에 대한 논의를 하고 나서 아마도 당시에는 집 한 채쯤 살 수 있을 만한 자료비를 내놓았는데, 당시에는 복사기술이 아주 낮은 단계에 있었으므로 사진기자들을 불러 규장각에 있는 자료들을 일일이 사진으로 찍어오도록 했다. 왕조실록도 관계된 부분들을 모두 사진으로 찍어오게 하였는데 이러한 사진을 찍은 자료집이 스크랩북으로 무려 스무 권쯤 되었다.
자료비라고 원고료도 아닌 돈을 받고 보니 그때 문단이 너나없이 모두 가난하던 시절이라 이 친구 저 친구 만나는 동료들마다 술 한 잔 사라고 난리였고, 나도 한창 때여서 술 한 번 원없이 마셔보자고 벼르던 참이었다. 패거리를 지어 한 보름쯤 줄창 퍼마시다 보니 자료비라는 돈이 거의 없어져 버렸다. 때는 이미 늦었지만 뒤늦게 인사동 고서방이나 청계천등지를 뒤지며 고서와 전적들을 그러모았다. 그렇지만 예상대로 자료의 절반도 채 모을 수 없었다. 예정 연재날짜는 다가오는데 속수무책이라 하는 수 없이 무턱대고 10층 사주실로 쳐들어갔다. 사주님 만나러 왔다니까 약속이 되어 있느냐고 그래서 우물쭈물 그렇다고 해버렸는데 사실은 예의상 절차를 전혀 무시한 셈이었다. 실은 그 사건으로 이부장과 한 동안 날카로운 긴장관계에 들어가긴 했지만, 하여튼 백상선생은 무표정했다. 무슨 일이냐고 그래서 사실은 지난 번에 주신 자료비로 그동안 밀린 술을 마시고 다 써버렸다고 했더니 크게 웃는 것이었다. 그는 이번에도 다시 한 번 자료비를 내놓았고 명함에 메모를 끄적이더니 이제부터 술을 마시려면 그 집에 가서 자기를 대고 마음대로 마시되 자료비는 꼭 자료에만 쓰라고 당부하는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자료는 대충 모았지만 이번에는 자료를 분석하고 추려낼 시간이 모자라다 보니 연재를 시작했어도 많은 양을 써댈 수가 없었다. 날마다 한두 꼭지가 고작이었고 이미 화단의 원로급인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 화백은 원고를 기다리느라고 여행은커녕 외출도 마음대로 못할 지경이었다.
이번에도 백상선생의 지원이 시작되었다. 선생은 당시에 바둑대회를 자주 열던 운당여관 특실에 아예 집필실을 잡아두고 원고를 쓰도록 해주었다. 셋방살이에 고달프던 나로서는 호화판 집필실인 셈이었는데 이 또한 얼마 못 가서 악우들에게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가 있건 없건 인사동이나 청진동 근방에서 떼거리로 술을 마시다가 잠자리를 찾아오거나 아예 내 앞으로 달아놓고 술 한 상 거창하게 시켜다 먹고는 사라져버리곤 했다. 이렇듯 시작된 연재였지만 한국일보의 그 누구도 소설 「장길산」이 끝날 때까지 이것은 파란만장한 악몽의 예고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설마설마 믿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화부 고참기자는 내 소설 원고 한 회분을 들고 운보에게 갔다가 가슴을 치며 답답함을 표현하는 노화백의 꾸중을 들은 뒤에 먹물이 마르지 않은 삽화를 입으로 후후 불어대며 들고 뛰기도 하였다. 어느 때는 한 밤을 꼬박 새우고도 한 줄도 쓰지 못하여 펑크를 내고 숨어버린 적도 있었는데 그러면 문화부기자들은 물론 평소에 한국일보측과 잘 아는 환쟁이나 글쟁이들이 나를 잡으러 사방으로 다니며 뒤지고는 하였다. 원고를 두 꼭지는커녕 날마다 한 꼭지씩밖에 쓸 수 없을 때에 내가 원고를 갖다주는 방식은 출입구 앞의 경비원 책상에 던져두고 달아나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피차 애를 끓이다가 드디어 나는 서울생활을 청산하기로 하고 전남 해남으로 이사를 가기로 결정했고 신문사에서는 긴가민가 하면서도 불안한 환영의 기색을 보였다.
사실은 해남에 가서 조용히 집필에 전념한다는 일은 전혀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았고 서울에서보다 더욱 끔찍한 상황이 벌어지게 되어 있었다. 유신시대 전 기간을 소설 쓰는 일 외에 이른바 「민중문화운동」이라고 불리던 대중의식화 작업에 몰두했던 나는 해남에 가서도 「농민학교」를 만들고 농민회를 조직하는 데 정력을 소비해야 되었다. 그러니 소설 쓰기는 다시 고작해야 이삼회 분, 또는 서울에서처럼 한 꼭지씩 보내는 날이 많았다. 그 때에는 팩스는 물론 개인전화조차 드물던 때여서 꼼짝없이 광주의 한국일보지사로 인편을 통해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광주지사에서는 내 원고를 받아 텔렉스로 보냈는데 물론 영문으로 한글발음을 찍어서 전송했던 것이다. 이는 마치 암호 해독하는 작업과도 같아서 문화부의 연재 담당기자는 골머리를 앓았다. 특히 순 우리말이나 한자어가 많이 나오는 장길산의 원고를 영문으로 읽어 한글로 바꾸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광주지사에 보낼 때에는 농민회 식구들이 번갈아서 해남 읍내의 차부에 나가 광주로 가는 아무나를 붙잡고 사정하여 버스편으로 보냈는데 텔렉스는 좀 나은 편이었다. 마지막 마감시간까지 댈 자신이 없으면 아예 한 꼭지를 들고 식구나 내가 읍내 우체국으로 달려갔다. 시골전화라 그 곳은 아직도 교환이었다. 처음에는 교환양이 불러대다가 아무래도 본인이 더 정확할 테니까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여 내가 직접 불렀다. 소설이 워낙에 점잖은 대목보다는 싸우고 욕질하는 장면이 많아서 본사의 여기자에게 불러주다 보면 본의 아니게 상소리를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들으니 여기자는 그때마다 부끄럽고 분하여 눈물바람도 여러 번 했던 모양이었고 우체국 교환양들은 내가 소리소리를 지를 적마다 새깔거리며 웃어대어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나중에 이 실례를 스타킹 한 타스씩 돌려 무마했던 기억이 난다.
그냥 해남에 머물렀으면 그런대로 길이 나고 익숙해져서 나중에는 연재의 리듬이 생겨났겠지만 천성이 떠돌이라 광주로 나가게 되고 이어서 전국을 무대로 뛰어다니는 이른바 활동가가 되었다. 이제 원고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날아가기 시작했다. 부산역, 대구터미널, 마산, 전주, 대전, 심지어는 제주도의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이름없는 동시대 사람들에 의하여 신문사로 배달되었다. 그때에 수없는 사람들이 원고를 날랐지만 여러차례 늦게 도착해서 펑크가 난 일 빼고는 한 번도 원고를 분실한 적이 없으니 나는 그 분들과 함께 작품을 쓴 셈이다.
장길산을 연재하면서 장기 휴재(休載)를 했었는데 다섯 번쯤 되는 것같다. 한 번은 내가 해남에서의 악조건을 참아내지 못하여 빌다시피 사정하여 육개월인가 쉬었고, 다시 얼마 못 가서 광주로 이사한 뒤 간염으로 쓰러져 입원했고, 10·26 직후에 광주YWCA사건으로 계엄법을 위반하여 상무대 군감방에 갇히느라고 쉬었으며, 광주항쟁이 일어나고 나서 서울에서 도피하는 동안에 일년여를 쉬었고, 마지막 부분을 쓰면서 다시 일년여를 쉬었다가 가까스로 숨가쁘게 마칠 수가 있었다.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문화부장이 대여섯 사람 갈렸고 편집국장도 그쯤 되는 듯 하다. 그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나를 웬수로 알며 이를 갈았다. 문학 담당을 했던 여기자는 문화부 말단으로 내 원고를 담당했었는데 마감시간까지 간을 졸이다가 불러주는 원고를 받아쓰고 나서는 참으로 끔찍하고 지긋지긋했다는 이야기를 해서 기억도 없던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얼굴 모르던 동시대 사람들의 사랑과 도움에 의하여 장길산은 연재를 마칠 수가 있었다. 장길산 원고를 날라주던 그 선량한 독자들은 지금쯤 어디서 무엇들을 하시며 살고 계실까. 나중에 누군가가 하던 말이 생각난다. 사회적으로는 군사독재와, 매체로는 한국일보라는 비교적 리버럴한 신문사가 아니었다면 「장길산」이라는 소설은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라고들 한다. 그리고 「장길산」은 또한 나의 인생이었다.
'책 리뷰 > 소설 일반 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두린 왕자 (8) | 2025.08.07 |
|---|---|
| 하룻밤만에 읽는 남북국사 (2) | 2025.07.29 |
| 아내의 영전에 (8) | 2025.07.26 |
| 춘향전 (5) | 2025.07.05 |
| 동물 농장에 이어 1984를 읽고 있다 (1) | 2025.07.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