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무렵, 전국 여행기 1
서른 무렵, 전국 여행기 1
1999년 9월. 작은형 사업과 관련해 100만원이 생겼다.
정말이지 뜻밖의 일로 내겐 거의 공돈이나 다름없었다.
굳이 설명을 하자면 소개료다.
우연한 기회에 작은형이 가진 기술을 그 기술을 필요로하는 어떤 이들에게 연결
시켜주었던 거다.
그들에게 기술 사용료를 받은 작은 형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내게
100만원을 준 것이다.
나는 돈을 어디에 쓸까 고민했다.
돈이야 늘 부족하지만 그래도 기억에 남을만한 무엇인가를 해보고 싶었다.
먼저 오디오가 생각났다.
이 참에 고장이 잦은 오디오를 버리고 성능좋은 새오디오를 장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음에 그리 민감하지 않았다.
카세트 라디오만으로도 음악을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저금은 어떨까?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다.
생활의 안정도 중요하지만 기억에 남을만한
무엇인가를 해보고 싶었던 거다.
아.
그렇다.
여행이다.
생각해보니 여행을 다녀온게 언제인가 싶었다.
만화를 그린답시며 방구석에서 나올 생각을 안했고 나온다해다 서울 시내를
벗어나지 않았다.
여행이란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즐기는 호사일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 여행을 떠나고픈 마음이 늘 존재했다.
스무살 무렵 한 여자와 갔던 대구 동성로와 부산
태종대가 생각났다.
구미 금오산 채미정도 생각났다.
광주도 생각났다.
친구들과 다마스를 타고 떠났던 강원도도 생각났다.
군입대 전 떠났던 남도 여행도 생각났다.
선배들과 나의문화유산답사기를 떠난 영암 강진여행도 생각났다.
형제들과 함께했던 4박5일간의 강원도 여행도 생각났다.
그러고보면 여행을 아주 떠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횟수가 적을 뿐이었다.
그래 이 참에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누비는 전국여행을 해보는 건 어떨까?
마침 집가까이 살던 한기형이 타고 다니던 오토바이를 판다하였다.
대림에서 나온 VF125로 .배기량은 125cc였다.
자동차 운전면허증만으로도 탈 수 있었다.
연식이 오래되어 25만원만 달라고 했다.
100만원에서 25만원을 빼니 75만원이 되었다.
선배의 여섯살 아래 동생인 영옥이가 물었다.
"정말 이 걸 타고 전국 여행을 할 거예요?"
직장 생활을 하는 영옥이는 귀여운 아가씨다.
선배집에 가면 이따금 보는데 목하 연애 중이었다.
만화가 이현세 선생은 동료작가인 안춘회 선생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이상무 선생의 여동생도 후배작가와 결혼을 했다.
이들 관계를 생각하면 영옥이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도 싶은데
아무 일도 없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래도 조심히 다녀오란 말이 고마웠다.
75만원.
최대한 아껴서 최대한 오래 다니리라.
어차피 남는 건 시간 아닌가!
옥탑방을 전세로 살고 있어 월세를 낼 일도 없었다.
내 인생에서 몸이 가장 가벼운 시기이기도 했다.
부양 가족도 없고 빚도 없는 그런 상태.
있다면 오직 여행에 대한 설레임 뿐.
나는 며칠사이로 오토바이를 타고 동네를 돌았다.
오토바이를 몸에 익히기 위해서다.
사고가 날까 걱정도 됐지만 그럼에도 다닐만하단 생각이 들었다.
전국 여행을 하기 위한 두번 째 단계로 가까운 서점에 가 전국 교통지도를 한 권 샀다.
길들이 얼기설기 빼곡했다.
마음은 이미 전국 구석구석을 달리고 있었다.
한동안 비우고 있을 옥탑방을 뒤로하며 시동을 걸었다.
오토바이는 영등포 신길동 골목을 벗어나 어느덧 시흥대로로 접어 들었다.
국토를 위아래로 지르는 1번 국도다.
차량행렬 사이를 위태롭게 달리고 있는 나!
정말로 이 걸 타고 전국여행을 갈 거냐 묻던 영옥이 말이 생각났다.
걱정이 묻어나있는 말투였다.
한기형도 은근 걱정되는 투로 말하였다.
"조심해라"
믿기지 않았다.
현실이 아닌 것 같다..
훗날 동양과 서양을 가르는 보스푸루스해협을 건넜을 때도 그랬다.
일상을 크게 벗어나 있을 때마다 드는 기분이다.
인천 화성 수원 평택 입장 천안 성환 공주 ...
나는 클러치와 악셀을 밟으며 쉬지않고 달렸다.
낮을 가르고 밤이 된 뒤엔 어둠을 끝없이 가르며 달렸다.
밥은 식당에서 먹고 잠은 여인숙에서 잤다.
여인숙은 여관이나 모텔보다 만원 정도 더 쌌다.
대신 밤새 퀴퀴한 냄새를 견뎌야했다.
어느날엔 숙소를 구하지 못하여 남의집 처마에서 잤다.
날이 밝아올 무렵 집주인이 나를 깨웠다.
"무슨 일입니까?"
"여행 중 잘곳이 없어서... "
집주인은 나를 집으로 들어오게해 아침밥을 같이 먹었다.
여느 시골집과 마찬가지로 살림살이가 소박하였다.
이 곳이 어디냐 물으니 부여두리라고 했다.
아...이곳이 백제의 왕도인 부여로구나.
백제의 수도 공주와 부여를 가르며 흐르는 금강은 은빛으로 빛나 더 아름다웠다.
같은 금강이면서도 부여쪽은 백마강이란 이름으로 따로 불렸다.
한강이 구역마다 서강, 동호, 여강등으로 불리는 것과 같다.
황포돛대가 떠다니는 구드래나루터를 지나 낙화암에 올랐다.
적에게 욕을 보이지 않으려 바위밑으로 몸을 던지는 삼천궁녀의 모습이 보였다.
꽃처럼 떨어져 이승과 이별을 고하는 여인들.
낙화암 이야기는 만들어진 이야기다.
개인문집에 쓰여진 이야기가 사실인양 전한다.
하지만 거짓 전설인 줄 알면서도 백제의 멸망 앞에선 마음이 분하였다.
고려 인종 때 권신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편을 읽으며 느꼈던
감정이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그 때 의자왕이 좀 더 현명했더라면...
탄식이 절로나왔다.
어느 왕조가 되었든 망국의 역사는 슬픈 법이었다.
중국 북송과 남송이 그렇고 동로마제국이 그렇고 고려와 조선이 그렇다.
땅거미가 질무렵 백마강가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물수제비를 하였다.
파문을 그리며 멀어지는 돌멩이.
강물이 노을빛으로 잠길 때까지 내내 바라보았다.
밤이되자 별빛이 쏟아졌다.
어린시절 시골집에서 봤던 그 별빛이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만의 별이 있다는데 내 별은 어딜까?
있기나 할까?
이틀에 걸쳐 공주와 부여의 박물관들과 왕릉을 돌아보았다.
백제의 영화를 생각하기엔 유물이 너무나 적었다.
나는 논산 군번이다.
논산 제2 훈련소에서 6주간의 군사훈련을 받았다.
1953년 한국전쟁 직후 군대 입대한 아버지도 논산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나는 춘천으로 자대배치를 받았고 아버지는 김제로 자대배치를 받았다.
아버지는 근무지인 김제에서 어머니를 만나 결혼했다.
사병인데도 영외거주를 하며 신접살림을 꾸렸다.
아버지 인생에서 가장 잘한일은 어머니를 만난 것이었다.
그로인해 내가 태어났으니.
그날 아버지가 우물가를 지나며 어머니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논산 훈련소에서 받은 아버지의 편지는 담담했다.
어린시절 큰형에게 들었던 황산벌 전투는 머리속에 아주 깊이 각인되었다.
김유신장군이 이끄는 5만대군과 맞서싸운 계백장군의 오천결사대는 비장하기 이를데 없었다.
논산(정확히는 연산)은 황산벌 전투가 있던 곳.
하지만 전투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TV프로그램에서 본 탑정호도 생각났으나 역시 찾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은진미륵도 그냥 지나쳤다.
익산 미륵사지도 어디에 있는지 몰라 그냥 지나쳤다.
오토바이는 달리고 달려 고향 김제 용지에 이르렀다.
고향을 떠나온 이후 다른 이들이 가 살고있는
집과 나와 형제들이 다니던 초등학교를 둘러보았다.
고향엔 단 한 명의 친구도 남아있지 않았다.
가장 친하게 지내던 승룡이는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속눈섭이 길어 누나가 이쁘다 칭찬했던 성옥이는 소식을 모른다.
그리고 한동안 친하게 지내던 찬표란 같은반 친구가 있었다.
찬표네 학교에서도 멀고 우리집에서도 멀었다.
그래서 찬표네 집에 놀러 갈 땐 언제나 아버지 자전거를 탔다.
우리집도 그렇지만 찬표네집도 딱히 놀게 없었다.
주로 찬표와 세살 터울인 쌍둥이 동생들과 함께 테레비를 보았다.
지금도 그 때 보았던 인형극이 생각난다.
후백제 왕 견훤을 장남 신검이 금산사에 가두는 장면이었다.
테레비를 보고나면 밤이 늦곤하였다.
집도 멀지만 무덤이 많은 게 걱정이었다.
무덤을 지날 때마다 돋아나는 소름.
특히 공동묘지를 지날 땐 자전거 폐달을 몇배나 더 세게 밟았다.
오토바이를 타고 찬표네 집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옛날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마침 찬표 아버지가 집에 계셨다.
어린시절 친구라 말하니 찬표는 군산에 살고
있다고 했다
반가운 마음에 연락처를 알려줄 수 없냐고 물었다
찬표 아버지는 뜻밖의 대답을 하였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 줄 아냐며 알려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때 마침 찬표 누나가 문을 열고 나와 말했다.
자기가 찬표 어릴 때 친구들은 다 아는데 나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고 했다.
나역시 찬표 누나가 있는 줄은 몰랐다.
아버지를 본 기억도 없었다.
그래서 대답했다.
나는 와룡 외딴집에 살던 의사양반(무면허) 아들이고
찬표의 쌍둥이 동생들도 알고 있다고.
어린시절 서울로 올라왔기 때문에 모를 수도 있다고.
그럼에도 그들 부녀는 내 말을 믿을 수 없다
하여 나를 내쳤다.
기분이 참담했다.
찬표 아버지와 누나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린시절의 추억이 산산조각 나는 듯 했다.
허름한 내 차림새가 문제였을까?
만약 오토바이가 아닌 고급 자동차를 타고 나타났어도 그랬을까?
혹 찬표 녀석이 누구의 연락도 받지 말아야할 피치못한 사정이 있는 건 아닐까?
예를 금융사고를 저지르고 달아났다는.
별의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오토바이에 몸을 실은 나는 씁쓸한 기분을 떨쳐버리지 못한채 찬표네 집과 고
향 김제를 벗어나 아래로 아래로 달렸다.
속도에 중독돼 100키로 이상 달리고 있으면서도 빨리 달리고 있단 생각을 못했다.
정읍, 고창, 순창, 장성, 무안...
잠은 마찬가지로 여인숙에서 자기도 하고 마을 정자에서 자기도 했다.
밥은 코펠로 해먹었다.
식당서 사먹기도 했는데 밥을 사먹을 때마다 돈이 훅훅 줄어드는 걸 느꼈다.
친구에게서 얻은 텐트는 치는게 워낙 번거로워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우리의 본향인 나주를 지나자 멀리 영암 월출산이 보였다.
도봉산과 관악산을 외엔 한번도 산다운 산을
올라보지 않아 한 번 오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튿날 월출산 입구인 천왕사에 닿았다.
절앞에 오토바이를 세워두고 천황사를 둘러보는데 보통의 절과 달리 여염의
살림살이들이 보였다.
중년의 여성도 있었다.
여느 절에서 보던 공양주보살은 아닌 것 같았다.
마침 스님이 계서 인사를 드렸더니 방으로 올라오라면서 차를 내놓았다.
내가 여행 중이라 말하자 스님은 조심하라며 몸을 상하는 일은 하지 말라 하셨다
이어 말씀 하시길 스님들 가운데 만행을 너무
열심히 하여 고생하는 이가 많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불도를 닦는 것도 몸을 돌아보며 해야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천황사는 법화종으로 결혼을 허락하는 곳이었다.
<계속>
202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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