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5년 12월 만화광장이 창간되고 인터뷰 기사가 서너 페이지에 걸쳐 실렸더랬다.
인기절정의 만화가 이현세.
나는 깜짝 놀랐다.
워낙 히트한 만화가 많은 까닭에 연륜이 지긋할 줄 알았는데 사진 속의 그는 너무나도
젊었고 더하여 너무나도 잘생겼기 때문이다.
만화가가 아니라 영화배우라고 해야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거기다 키도 무척 커보였다.
베일 속에 가려있던 작가가 얼굴을 드러낸 사건을 두고 나의 감정은 묘하게 흔들렸다.
그 것은 질투심이었다.
그의 열렬한 팬으로 그의 작품이란 작품은 모두 찾아 읽었지만
질투심이 찾아드는 건 어찌할 수 없었다.
어쩌자고 신은 한 인간에게 모든 걸 다 주었단 말인가?
고백하자면 나는 그의 인기가 수그러들기를 바랬다.
하지만 그의 인기는 나날이 치솟았을 뿐 아니라 CF광고 모델이 되어 티브이
브라운관에 얼굴을 끊임없이 내비쳤다.
OB 수퍼 드라이~
장엄한 그랜드 캐니언을 배경으로 맥주를 마시고 있는 그의 모습은 한 사람의
만화가를 뛰어넘어 한국 대중 문화를 상징하는 키워드가 되었다.
그의 만화는 공포의 외인구단을 필두로 줄줄이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되어
원소스멀티유즈의 모델이 됐다.
“폴리스” “테러리스트” “지옥의 링” “며느리 밥풀꽃에 대한 보고서”
“아마겟돈” 등의 작품이다.
변방의 하류문화로 머물던 만화가 이제 대중문화를 선도하게 된 것이다.
한국 만화 역사에 한 작가가 이토록 한 시대를 압도한 예가 있었을까?
없다.
그야말로 대본소는 이현세 화풍을 흉내 낸 아류작들로 가득했다.
이현세 광풍이 얼마나 거세었는지 당대 최고 실력을 가진 모 작가조차도
이현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이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한 작가의 작풍이 이처럼 대본소 시장을 휩쓸면 나머지 작가는 설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양성이 사라진 생태계는 결국 멸망한다.
아류작들의 범람은 결국 이현세 본인에게도 손해다.
너도나도 까치머리를 그리니 이현세의 까치머리가 특별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현세 시대를 마감한 건 아류작들이 아닌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제도였다.
천국의 신화에 등장하는 일부 장면을 외설로 규정한 검찰의
판단에 따라 이현세는 검찰에 불려다녀야 했고 그로 인해
불타오르던 창작의지는 한 풀 꺾이고야 말았다.
그리고 물밀듯이 밀려오는 일본만화에 한국 만화는
초토화가 되었다.
만화를 업으로 삼던 많은 사람들이 업계를 떠났고 나머지
사람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던 학습만화 시장으로 뛰어들었다.
살아남는 것만이 지상 최대 과제인 시대!
이 때 한국 만화는 새로운 씨앗이 싹트고 있었다.
인터넷 환경에 맞게 구현된 웹툰이다.
웹툰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최고의 만화가 이현세 역시 웹에 작품을 연재한다.
그의 만화가 시대를 뛰어넘어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기를 바란다.
다시 고백하자면 어린 시절 품었던 그에 대한 질투심은 여전하다.
그는 여전히 잘 생겼고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하고
그에 걸맞는 사회적 명망을 누리고 있다.
나는 그가 고맙다.
이렇게 잘 난 사람이 만화를 그려줘서.
덕분에 만화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어느 정도 좋아졌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그는 내게 너무나 멀리 있는 존재였다.
태양과 같아서 감히 다가설 수도 없고 그럴 생각도 못했다.
그와 같은 자리에 있게 해준 것은 2005년 만화의 날 행사였다.
나는 그를 속속들이 다 알지만 그는 나란 존재를 모른다.
나는 함께 사진 찎기를 청했고 그는 이에 응해줬다.
함께 찍은 사진 속에선 스트레스로 머리가 다소 빠졌지만 근래 사진들을 보니
머리가 풍성해 보기가 좋다.
숀 코네리는 늙어갈 수록 더 멋있어졌지만 그는 젊었을 때도 멋있고 나이를
들어서도 멋있다.
열렬한 팬이자 질투심을 품었던 남자로서 오랫동안 창작일선에 남아 나태해지는
후배들을 질타해주길 바란다.
오늘은 모처럼 그의 만화를 꺼내 보는 것도 괜찮겠단 생각이 든다.
2016.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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