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연 행차
볼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그 비싼 돈을 들여 불꽃놀이를 하여도 나가볼 생각을 안한다.
그러려니 하며 하던 일을 한다.
불구경과 싸움구경이 재밌지만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그리고 남의 불행을 보며 재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사람으로서 가져선 안될 감정이다.
나주와 인연을 맺은 뒤 나주 곳곳을 다녔다.
이제 왠만큼 나주에 대해 안다는 생각도 든다.
헌데 등잔불이 어둡다.
몇차례씩 가본 나주 금성관과 코닿을 거리에 있는 나주목문화관을 못가본 것이다.
지난 6월 27일.
마침 홍양현 형님이 교장으로 있는 나주학교에 놀러갔다가
엎어지면 코닿을 거리에 있는 목문화관을 가봤다.
지금은 볼거리가 넘쳐나지만 조선시대 백성들은 볼거리가 없었다.
뭔가 색다른 풍경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 늘 가슴속에 꿈틀거렸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불구경 싸움구경이다.
그만큼 볼거리에 목말라 했다.
어쩌다 남사당 패가 오기라도 하면 버선발로 뛰쳐나간 건 이 때문이다.
나주목문화관은 조선시대 백성들의 최고 볼거리를 전시하고 있다.
바로 나주목사의 신연행차를 피겨로 재연해 놓은 것이다.
조선시대 지방관인 고을 수령의 임기는 딱히 정해지지 않았다.
몇년을 하는 경우도 있고 재수가 없으면 부임길에 갈리기도 했다.
그래도 평균을 낼 수는 있다.
조선왕조 5백년 동안 제주목사가 250명이었으니 대략 2년 정도가 아닐까 싶다.
고을 수령이 부임을 하면 고을의 관원들과 구실아치들은 10리밖으로 나가 맞는다.
고을에서 동원할 수있는 최대인원이 삼현육각을 울리며 행진을 시작한다.
현감이 다스리는 작은 고을은 100명 안팎이었을 것 같고 나주목은 250명이었다.
250명이 깃발을 세우고 삼현육각을 불며 나아가는 모습은 일대 장관이었을 것이다.
날마다 있는 행차도 아니고 2년에 한 번 있는 행차다.
백성들은 이를보기 위해 너나없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행렬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거나 땅바닥에 엎드려야
했으나 그렇다고 볼거리를 놓칠 수 없었다.
이같은 신연 행차로 인해 생겨난 속담이 '원님 덕에 나팔 분다'이다.
이웃나라 일본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다이묘행렬에 수많은 백성이 뛰쳐나와 구경을 했다.
에도시대 막부는 지방영주인 다이묘들로 하여금 2년에
한 번씩 에도로 불러들여 살게했는데 이를 참근교대라 한다.
1년 동안 인질로 잡아두는 것이다.
이 때 다이묘들은 위신을 잃지않기 위하여 최대한 화려하게 행렬을 꾸렸다.
얕잡아 보이고싶지 않은 것이 인간의 본능.
다이묘들간 경쟁은 치열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행렬이 더 크고 화려해졌다.
그만큼 재정지출이 심했는데 이는 막부가 바라던 바였다.
다이묘들의 힘을 최대한 약화시키는 것이 막부의 목적이었으니 말이다.
먹고 자고 입는 것이 모두 일이다.
그래서 에도로 향하는 길은 수많은 장사치들이 들끓었다.
예기치 않게 참근교대로 인해 산업이 태동한 것이다.
그에 비해 조선은 검소했다.
신연행차라고 해봤자 고을 안 십리 거리다.
산업으로까지 발전할 수 없었다.
다만 고을 수령의 위엄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했다.
김홍도가 그린 '안릉신영'에 신연행차의 모습이 잘 표현돼 있다.
나주목문화관에서 재연한 신연행차는 제법 볼만하다
하지만 실제 행차의 3분1도 안되는 수준이다.
세어보니 75명이다.
장소가 비좁고 예산이 부족할 수도 있지만 이왕한 시작한 거250명 전부를 재현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202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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