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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소설 일반 도서

정화암 회고록

by 만선생~ 2025. 2. 15.

 
 
 
어릴 때 동생이랑 만화책을 함께 보면 나는 반쯤 읽고 있는데 동생은 다음
페이지가 넘어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동생은 답답해 했고 나는 마음이 급해져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만화책 뿐 아니라 소설책도 마찬가지였다.
남들이 반나절만에 다읽고 책장을 덮을 동안 나는 하루를 넘기기 예사였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책읽는 속도는 빨라지지 않았다.
아니 눈이 나빠지면서 속도가 느려졌다.
눈이 침침하여 중간 중간 눈을 감으며 쉬어야했고 그러다 깜빡 잠들기 일수였다.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들은 그렇게 읽어낸 것이었다.
오늘 다 읽은 "정화암 회고록"도 그랬다.
끝까지 읽는데 3일 정도 걸렸다.
그렇다면 정화암이 누군가?
김제 출신의 아나키스트이자 독립운동가이며 정치인이다.
2017년 김제에 살고계신 박찬희 선생님 안내로
화암 생가에 가기전 까진 화암이 누군지 몰랐다.
책날개에 꼭 김제가 고향임을 내세우는 나조차도.
지난 1월 박찬희 선생님께서 의논할게 있다며 김제에 오면 한번 보자고
하시길래 의아했다.
 
무슨일일까?
마침 광주 여행을 마치고 올라가는 길이어서 김제에 들렀다.
박찬희 선생님께선 사람들이 김제 사람들조차 화암을 너무 모른다며
책은 잘안보니 만화를 통해 알리고 싶다 하셨다.
그러면서 내민 것이 정화암 회고록이다.
1992년 개정판이 발간되었는데 한권밖에 없다고 했다.
심지어 후손이 갖고 있는 걸 들고 가져오셨단다.
복사를 여럿 해뒀다지만 그래도 선듯 들고 가기가 부담스러웠다.
실수로 책을 잃어버리면 어쩔 것인가?
나는 고료가 만만치 않음을 말씀드렸다.
내가 특급작가여서가 아니다.
만화는 워낙 노동강도가 쎄고 작업 기간이 길기 때문이다.
그 간 사람들이 종종 작품의뢰를 해왔는데 하나같이 깜짝 놀라 뒤로 나가
떨어지는 것이다.
다들 크게 힘 안들이고 슥슥 그리는 줄로만 안다.
어떤 이는 내가 부른 가격보다 낮게 부른 작가에게 작품을 의뢰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의 가치관과 맞지 않으면 작업을 할 수 없음이다.
만약 국힘에서 윤석열을 찬양하는 만화를 페이지당 500만원에 의뢰를
해왔다 치다.
100페이지면 5억 200페이지면 10억이다.
그릴 수 있나?
나는 작년 가을부터 윤상원이란 인물에 매료돼 윤상원과 5.18에 관한 책들을
읽었고 영상들을 찾아서 보았다.
광주에 갔던 것도 윤상원 열사의 발자취를 따라 가보기 위해서였다.
정화암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하지만 마냥 외면할 수 없는게 "정화암 회고록"이었다.
3일에 걸쳐 읽은 나의 느낌은 이렇다.
문장이 생각보다 훌륭하다.
 
80년대 초 화암이 구술한 걸 외손이 받아 썼다는데 지금 읽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
문제는 자신이 언제 어디서 태어나고 어떻게 자랐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이 바로
독립운동 한가운데 서있다는 것이다.
뭔가 열심히 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 사람에 대해 아는바가 없으니
감정 이입이 안됐다.
뒤에 살짝 나오긴 하지만 그조차도 건조하기 이를데 없다.
그런면에선 백범일지와 많이 비교되었다.
백범을 탐탁치 않게 생각한 화암이지만 자신과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을 알리는데는 실패한 것이다.
화암을 주축으로 한 남화청년연맹은 백범으로 대표되는 임정과 협력하면서도
갈등하는 관계다.
헌데 그 감정을 너무나 노골적으로 드러내어
읽는 내내 불편하였다.
김구를 마치 동년배나 아랫사람 대하듯 기술하고 있는데 찾아보니 김구가
스무살 많았다.
아버지 뻘인데 이렇게 함부로 말하나?
백범일지를 몇번씩 읽으며 감동을 받았던 나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적의 적은 친구라고들 한다.
김구의 정적인 이승만에 대해선 아주 호의적이다.
능력이 아주 뛰어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자유당 시기 야당으로 정치활동을 했음에도
이승만에 대한 비판이 전혀없다.
중국에서 화암의 활동은 눈물겹다.
생사를 넘나들며 조직을 만들고 밀정을 암살한다.
 
구파 백정기와의 우정도 특별하다.
열혈남아 중 열혈남아가 백정기 의사다.
백정기 의사와 일본소녀의 러브스토리는 한 편의 영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었다.
나이가 꽤 찼음에도 화암이 가정을 이루었단 얘기가 안나온다.
그러다 느닷없이 딸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내에 대한 언급이 없다.
분명 존재하는데 어떻게 만났고 이름이 무엇인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라면 최대한 자신을 숨기기 위해 안쓸 수도 있지만 80년대 초다.
왜 없는 사람 취급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맘에 안들었나?
홍콩에선 아이들 교육에 그토록 신경을 쓰던데...
심지어 비문에서조차 아내의 이름이 없다.
아들과 딸 손자의 이름까지 쓰고 있으면서...
누가 내게 해명을 해줬으면 좋겠다.
최준례 여사에 대해 적지않은 분량을 할애해 쓴 김구와는 너무나 다르다.
심지어 김구는 피난 시절 자신을 보필해 준 중국
여인 주애보에 대해 솔직하게 쓰고 있다.
화암도 좋아했던 여자가 있기는 하였다.
북만주 해림에서 활동할 때 김좌진장군의 부인인
나혜국 여사의 동생 나혜국을 마음에 둔 것이다.
자매가 모두 예뻤고 그 곳에 살고 있는 남정네들 모두
처녀인 나혜국에 연정을 품었다고 한다.
하지만 만주사변으로 인해 화암은 해림을 떠나야했다.
북만주 해림은 2019년 성남독립운동가 웹툰 프르젝트를 진행할 때
성남문화재단에서 후원을 해 가보았다.
그래서인 해림 부분은 더 와닿았다.
약간의 썸을 탔던 여인에 대해선 이름까지 밝혀가며 쓰고 두 아이를 낳아준
여인에 대해선 아무 말이 없는 화암.
비정하다고 해야하나?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책을 읽으면서 새삼 깨달은 것은 아나키스트들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태도다.
똑같이 일본에 맞서 싸우면서도 서로를 원수처럼 여긴다.
아나키스트들의 헌법과도 같은 남화한인청년연맹 선언문에도 자본주의와 더불어
공산주의에 대해 혹독하게 비판하고 있다.
조선인의 자유를 송두리때 러시아에 팔아넘기려는 상인에 불과하다는 말을 한다.
화암이 북쪽이 아닌 남쪽을 선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백범을 존경하면서도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갖고 있는 적개심을 난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무리 국민당 장개석 측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는 입장이라해도 그렇게까지
공산주의자들이 싫을까 싶었다.
헌데 아나키스트들의 입장도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범은 분단을 막기 위해 북으로 가 김일성을 만났으니
진정 조국을 사랑한 백범이 아니었을까 싶다.
화암을 그리게 될지 아니면 한 권의 책을 읽은 것으로 끝낼지 알 수가 없다.
다만 못다한 숙제를 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마지막으로 남화한인청년연맹 선언문은 교과서에 실려야할만큼 명문이다.
글이 너무 좋아 인터넷에 있을까 검색해봤는데 없다.
한 번 베껴 써볼까싶지만 너무 길어서 못쓰겠다.
박찬희 선생님을 만났을 때 드렸던 말씀이 있다.
개정판을 찍는게 먼저라고.
만화책은 그 다음이라고.
바라건대 어서 빨리 화암 회고록 개정판이 출간됐으면 좋겠다.
마음이 조금 불편한 점도 있지만 독립운동사에서 없어선 안될 저작이다.
 
2023.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