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은 연락이 끊겼지만 고등학교시절부터 같은 꿈을 꾸는 친한 친구가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친구는 고등학교를 마친뒤 한 만화가 선생의 문하생이 되었다.
내 눈에 차지 않지만 나름의 인지도를 가진 만화가였다.
군복무 중 휴가를 나와 친구와 만났다.
자연스레 친구가 문하생으로 있는 만화가 선생의 화실을 방문했다.
만화가 선생의 첫인상은 날카로웠다.
몸이 불편한 까닭인지 외부를 향해 온몸 가득 가시를 세우고 있단 느낌을 받았다.
만화가 선생은 우리들 앞에서 만화가들의 수준 낮음을 한탄하였다.
대학 나온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고 고등학교도 못나온 사람이 비일비재
하다는 것이다.
사실 그랬다.
소설, 드라마, 시나리오 등 다른 장르 작가들보다 만화가들의 학력 수준은
높지 않았다.
설령 졸업을 못했어도 대학물을 먹었다는 것만으로도 한번 더 바라보게 되었다.
멀리갈 것도 없이 나부터도 고졸이었다.
학력이 작품의 질을 보증해주는 절대조건이 될 순 없어도 무시할 순 없는 일이다.
중학교를 나와 바라보는 세상과 대학을 나와 바라보는 세상은 그 깊이와
넓이가 다를 수밖에 없을테니...
그리하여 나는 결심했다.
대학을 못들어간 대신 폭넓은 독서와 경험을 통해 대학을 나온 사람들보다
수준높은 작품을 선보이겠다고.
헌데 만화가 선생님의 말씀은 이상한 곳으로 흘러갔다.
만화는 예술이 아니란 거다.
읽고 버리는 한낱 일회성 소모품에 불과한데 만화가 대단한 예술인 줄 알고
그리는 정신나간 이들이 있다는 거다.
그러면서 백성민선생과 오세영선생을 꼽았다.
백성민 선생은 내 스승님이고 오세영 선생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였다.
대중성은 떨어질지라도 진실로 이 두분 선생님의 작품을 좋아했다.
나는 당연 만화가 예술이라 생각했고 두 분은 내가 다다르고 싶은 산으로
우뚝 서있었다.
만화는 내게 신앙과도 같았다.
터럭 하나도 다쳐선 안될 절대적 존재였다.
그만큼 내겐 소중한 꿈이었다.
거기다 백성민 선생과 오세영 선생은 밤하늘에 가장 빛나는 별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까 뭉개는 만화가 선생님.
그럼에도 숱기가 없는 나는 내내 듣기만 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가치를 높이기 위해 애쓴다.
남들이 보기에 별것 아님에도 스스로는 대단하다고 여긴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여야 한다.
자신의 일을 하찮게 생각하는 사람과 더이상 무슨 이야기를 하고 또 무슨 거래를
할 수 있을까?
아닌게 아니라 기획 스토리 연출 그림을 다하여야 하는 만화는 정말
특별한 존재다.
만화가는 마땅히 사회로부터 그만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만화를 하위문화로 치부하며 자신의 일을 하찮게 여기는
만화들을 여럿 만났다.
이들의 작품은 한결같이 모두 비루했고 어느 사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친구가 문하생으로 있던 만화가 선생은 잇단 표절문제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그리고 스포츠 신문에 연재된 작품이 통째로 일본 만화를 표절한 게 발각되어
더이상 작품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표절을 일삼는 만화가가 만화를 예술이라 생각할 순 없었을 터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소설 "로봇"에서 로봇의 3원칙이 제시되었듯 만화가에게도
원칙이 제시되어야 할 것 같다.
제 1원칙 만화를 사랑하라.
제 2원칙 자신의 작품을 비하할지언정 만화를 깎아내리지 말라.
제 3원칙 자신의 작품을 읽어준 독자를 향해 무한히 감사하라.
202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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