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주 관아 1
언젠가 최새힘 선생과 대화를 나누던 중 충주에 관아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선시대 지방 행정의 중심이었던 관아는 내 주된 관심사다.
그래서 기회가 닿는대로 관아를 찾아다니곤 한다.
고을 원인 사또를 비롯해 비장, 아전, 군노사령, 관노들이 기거했던 곳.
큰 고을은 250명 작은 고을은 100여명이 근무했다.
건물은 객사, 동헌 내아, 유향소, 작청, 외삼문 내삼문, 군기고, 반빗간, 옥 등 십여개에 이르렀다.
하나의 거대한 건물군이다.
그런 곳이 조선 팔도 350개 정도 되었다.
군영까지 합치면 50개는 더 될테다.
임금을 대리해 백성들을 다스리는 곳!
그 위엄은 말할 수 없이 높았다.
하지만 식민 지배와 전쟁 그리고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소수의 건물만 남아있다.
온전히 보존돼 있는 관아는 단 한 곳도 없다.
그나마 모양을 갖춘 고창 읍성은 근래 상당부분 복원을 한 것이다.
원 모습이 아니다.
관아는 남아 있는 곳도 거의 없지만 그 것마저도 따로 따로다.
객사와 동헌이 각기 열 곳 정도 내아 몇 곳 작청이 두어 곳 남아있을 뿐이다.
남도 여행을 마치고 의정부로 올라오는 길.
시간을 내 충주 관아공원을 들르기로 하였다.
충주 관아엔 남아 있는 옛 건물은 세 개다.
그 중심엔 동헌인 청녕헌淸寧軒이 있다.
안내문에 따르면 충주 관아는 1870년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고 그 해 다시 복원을 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청녕헌은 150년이 되었다.
목은 군, 현보다 크다.
목을 다스리는 목사는 군수, 현령, 현감보다 품계가 높다.
당연 건물도 크다.
목재가 옛날 그대로였다.
새로 복원한 건물에선 느낄 수 없는 깊이가 있다.
건물 뿐 아니라 몰래가 깔린 뜰도 좋다.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채광을 위해 잔디를 심지 않았다.
뜰이 부드럽기 짝이 없는 모래흙이다.
걷기에 아주 좋다.
마침 어르신 한 분이 맨발로 관아뜰을 걷고 있었다.
이 근처에 사시냐고 묻자 그렇단다.
말투가 충청도보다는 강원도에 가까웠다.
충주가 고향인 최새힘 선생의 말투가 그랬다.
어딘지 강원도 스러웠다.
그러고보니 충주는 강원도와 가깝다.
내 고향인 김제, 전주 말투도 전라남도보다 충청도에 가깝다.
그래서 간혹 고향이 충청도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 때마다 고향이 전라도 김제라고 힘주어 말하곤 한다.
건물은 너무나 멋졌다.
그리하여 나는 건물을 앞뒤 좌우로 샅샅이 돌아보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한옥 대청마루에 올라 눕는 것이다.
나무의 감촉을 느끼며 대들보와 서까래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내가 맛볼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대청마루엔 올라설 수가 없었다.
대청마루에 엉덩이를 붙이려는 순간 경보음이 울렸기 때문이다.
대청 마루 뿐 아니라 문들도 꽁꽁 닫혀 있어 안을 들여다볼 수가없었다.
문제다.
문화재니만큼 건물에 함부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출입 자체를 아주
막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사람 손이 닿지 않는 건물은 빨리 망가진다.
환기가 되지 않으면 건물이 상한다.
문화재로 등록된 건물 모두가 이렇다.
사람도 근육을 써야만 근육이 유지되지 않던가!
이런 아쉬움을 남기며 건물을 한 번 더 돌아보았다.
2025.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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