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조광철 입력 2023.02.27 00:00 댓글 0
[광주 갈피갈피]광주서 발견된 삼의당 김 씨 글에도 이름 없어
삼의당 김 씨가 남긴 유고의 표지. 1930년 광주에서 처음 인쇄돼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5만 원권 지폐에 등장하는 사임당 신 씨의 사임당은 당호(堂號)다.
그가 머물던 집이나 방의 이름을 따라 지었을 것이다.
이 당호는 그가 스스로 택한 것이라 하는데 태임이란 여성을 스승으로 삼겠다는 뜻이란다.
태임은 중국 주나라의 임금 문왕의 어머니다.
문왕을 가졌을 때 눈으로는 나쁜 것을 보지 않고 귀로는 음란한 것을 듣지 않으며 입으로는
거만한 것을 말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태교를 했다고 전해진다.
훗날 문왕을 성군으로 길러냈다 하여 조선시대에 이상적인 어머니 상으로 일컬어졌다.
언제부턴가 우리사회에서는 이런 태임에 버금가는 여성으로 사임당 신 씨를 꼽아왔다.
널리 회자되는 것이지만 사임당 역시 아들 이이를 어엿한 나라의 기둥으로 길러냈고
시와 그림에 상당한 재능을 뽐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누군가의 딸, 아내, 어머니로만 존재
그가 살던 시대에 사회적으로 사임당은 누군가의 딸, 아내, 어머니로 존재했지, 하
나의 개체로 살지는 못했다.
실제 그가 하나의 독립된 개체임을 상징하는 이름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물론 그도 당당히 부모가 지어 부른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인터넷과 일부 학술논문에는 ‘인선’이란 이름이 나돌고 있다.
그런데 석연찮은 구석이 많아 강릉시립박물관에 확인을 구했더니 ‘인선’은 근거 없는
얘기란 것이 그쪽의 대답이었다.
이름이 전하지 않는 여성은 사임당뿐이 아니다.
조선시대에 이름 없이 살다간 여성들은 부지기수다.
당호나 누구의 아내, 혹은 딸 정도로 알려진 정도다.
심지어 왕비들조차 그 이름, 즉 휘를 모른다고 한다. 정말 그럴까 싶어 종묘에 문의했더니
종묘에 모신 신주들에는 왕이든 왕비든 휘가 기재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그래도 왕의 휘는 다른 곳에 기록이 남아 전해지지만 왕비는 그렇지 못했다.
드물게나마 여성들의 이름이 전하는 경우도 있다.
사임당과 같은 강릉 출신인 허난설헌의 실제 이름은 초희였다.
‘음식디딤방’이란 조리 책을 남긴 안동 장 씨의 본명은 계향이었다.
미암 유희춘의 아내이자 문필가로 유명했던 담양의 송덕봉의 실명은 종개였고
덕봉은 그의 호였다.
송덕봉은 이름을 대신하는 자(字)도 있었는데 성중이 그것이다.
유희춘의 문집 ‘미암집’에는 성중에게 보낸다는 제목의 시가 여러 편 있다.
물론 이름 없는 삶이 어디 있겠는가?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군데군데 여성들의 이름이 나온다.
그중에는 우리에게 귀에 익은 어우동(어을우동)이란 사대부 여성의 이름도 보인다.
그러나 기록된 이름은 주로 양인 신분의 여성들이다.
그들의 이름에는 몇 가지 패턴이 보인다. 명덕, 금덕, 구질덕 등 덕(德) 자 돌림이 많다.
석비, 종비, 욱비처럼 비(非) 자를 쓴 이름도 많다.
아명이 굳어진 것 같은 자근아기(작은아기)란 이름도 보인다.
월선, 유화, 애향 등 금방 여성인지 알만한 이름들도 있다.
그렇다 해도 여성들의 이름이 남아 있는 경우는 여전히 적다.
물론 어지간한 집안이면 남아 있음직한 호적문서에 여성들의 이름이 보이기는 한다.
그런데 정작 그 안주인은‘누구의 처, ○씨’로 적고 있을 따름이다.
실명이 나온 여성은 거의 그 집에 딸린 여자종들이다.
“결혼하고 싶다”던 적극 여성, 김 씨
1600년대 중반 광주 부동방면 신기마을, 즉 지금의 사동 일대에 살았던 어느 집의
호적문서에도 안주인의 실명은 나와 있지 않다.
다만, 여종들의 이름만이 길게 열거되어 있다.
은상, 효대, 규년, 원상, 원향 등이 그것이다.
이런 이름을 보면 여종들이 천한 이름을 썼을 것이란 선입견과 어긋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양인이나 사대부 여성들의 이름과 별반 차이가 없다.
다만 성이 없는 것만 빼고 말이다.
그런데 천민까지도 엄연히 이름이 가지고 있었지만 여성의 이름은 사회적으로
중시되지 못했고 죽으면 곧 기억에서 사라졌다.
남원 출신으로 상당한 문학적 재능을 지녔던 삼의당 김씨(1769~1823)란 분이 있었다.
예전 남원역 일대인 동충동에서 태어났다.
여려서부터 성품이 활달하고 다부졌던 것 같다. 혼기를 앞두고 지은 시에는 이런 것이 있다.
“열셋에 얼굴은 꽃처럼 피어나고 / 열다섯엔 말을 조리있게 했지요
/ ‘예기’ 내측편은 유모한테 배웠고 / 첫 분단장은 엄마 따라 했지요 /
비로소 머리 묶어 비녀를 꽂게 되자 / 밥상을 들어 눈썹과 나란히 맞출 수 있게 됐지요 /
이제 매실이 셋밖에 남지 않았으니 / 광주리가 다 비었네요.”
마지막 두 구절 “이제~비었네요”는 ‘시경’에서 빌려온 구절이다.
결혼하고 싶으니 남정네더러 더 이상 미적거리지 말라는 뜻이다.
조선시대에 이런 욕망을 시에서나마 이처럼 적극적으로 피력한 여성이 몇이나 될까?
결국 삼의당은 열여섯에 같은 동네의 동갑내기와 결혼했다.
그러나 평생 관직을 얻지 못한 남편의 곁을 지키며 빠듯한 집안 살림을 챙겨야 했다.
그 동안 삼의당은 처녀시절의 열정은 점차 옅어지고 대신에 왠지 우울한 분위기가 감도는 삶을 살았다.
적어도 남아 있는 그의 시와 글에 그런 면모가 엿보인다.
어떻든 이렇게 남긴 작품들은 오랫동안 그가 생을 마감한 전북 진안의 어느 산간마을에
묻혀 있다가 1930년에야 광주에서 처음 발간돼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그런데 그런 삼의당 김 씨의 이름에 대해 우리는 모른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재개관에 즈음해 10여 년에 걸쳐 본보에 연재된 ‘광주 갈피갈피’ 중
광주의 근 현대사를 추려서 다시 싣습니다. 이 글은 2014년 3월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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