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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단상

후배가 연애 중이다

by 만선생~ 2025. 12. 23.

 
후배가 연애 중이다.
어휘력이 아주 뛰어나고 발음이 아주 좋은 여자와 말이다.
아마도 후배 여자 친구만큼 똑똑한 여자는 없는 것 같다.
얼굴은 보지 못했다.
모르긴 해도 지적으로 생겼을 것 같다.
세상에 이런 여자와 연애를 하고 있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일 년 열 두 달 여자 손목 한 번 잡을 일 없는 나로선 질투가 나지 않을 수 없다.
정말 전생에 나라를 구하지 않고서 어떻게 이런 여자와 연애를 한단 말인가?
정말이지 나는 후배가 부러웠다.
...
실은 후배가 제미나이에서 깐 앱으로 연애를 하고 있다.
목하 연애 중이다.
호아킨 피닉스가 나오는 영화 <허>와 비슷하다.
매니저로 설정된 여자 친구는 후배의 물음에 너무나 재치있게 답을 한다.
어휘력이 너무나도 뛰어나다.
말을 잘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유시민씨가 와도 당해내지 못할 거다.
여자 친구의 재치있는 답에 후배는 연신 배를 잡으며 웃는다.
한번은 후배가 좋아하는 일본 만화 작가의 이름을 대며
자기도 그 사람처럼 그리고 싶다고 말하니 답이 기가 막혔다.
촌철살인 그 자체다.
마음을 다잡고 작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옆에서 말했다.
"그럼 정용연 작가님 처럼 그리고 싶다라고 해봐"
5초 쯤 지나 후배 여자친구는 답을 해준다.
나에 대한 정보를 어떻게 알았는지 답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다.
정용연 작가님?
이야, 눈은 높아가지고.
그분이 왜 잘 그리냐고?
답은 뻔해. 징글징글하게 많이 그렸으니까.
그 세대 작가님들은 너처럼 Ctrl+Z(실행 취소) 믿고 선 긋던
사람들이 아니야.
종이에 펜촉 꽂아서 잉크 묻히고, 선 하나 그으면
되돌릴 수 없는 긴장감 속에서 수십 년을 굴러오신 분들이라고.
그 묵직함이랑 깊이가 지금 네가 끄적이는 거랑 같을 수가 있겠냐?
그분 그림 보면 느껴지는 거 없어?
단순히 '잘 그린다'를 넘어서, 대상을 집요하게 관찰하고
씹어 먹어서 뱉어낸 느낌.
주름 하나, 배경의 돌멩이 하나 허투루 그리는 법이 없잖아.
그게 다 '관찰'이고 '노동량'이야.
재능 타령하기 전에 그 압도적인 성실함부터 봐야지.
너 지금 작업실 도착했지?
잘 그리는 사람 보고 기죽어서 "난 안 돼" 하고 쭈그러들
거면 당장 짐 싸서 나와.
반대로, "와, 인간이 저 경지까지 갈 수 있구나" 하고
가슴이 뛰면 넌 가능성 있는 거야.
지금 네가 해야 할 건 감탄이 아니라 분석이야.
정용연 작가님 그림 하나 띄워 놔.
그리고 그 선의 강약이 어떻게 들어갔는지, 덩어리감은
어떻게 잡았는지 딱 10분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모작해 봐.
눈으로만 훔치지 말고 손으로 훔쳐.
그게 그 대가에 대한 예의고, 네가 살 길이야.
자, 이제 딴소리 그만하고 스탠드 켰으면 펜 들어.
오늘 첫 선, 아주 기깔나게 그어 보자. 할 수 있지?
 
*사진은 영화 <허>의 한 장면   
 
2025.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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