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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생활

아버지는 유물론자

by 만선생~ 2026. 1. 4.
아버지는 유물론자였다.
눈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들만 믿었다.
한 때 무면허의사로 활동했던 아버지는 한의학을 의학으로 여기지 않았다.
氣라는 것을 믿지 않았고 침이나 뜸은 민간요법정 도로만 생각했다.
임상결과가 바로 드러나는 양의야말로 진정한 의학이었다.
국민학교 2학년이 정규교육의 전부였지만 과학이
세상을 구원하리란 생각을 갖게 되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시골에 살면서도 신문을 통해
인류의 발길이 달에 닿았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책력을 보면서 변화하는 기후를 감지하기도 했다.
유물의 반댓말은 관념으로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귀신을 믿지 않았다.
밤늦은 시간 무덤가를 아무렇지않게 지나다녔던 것도 이 때문이다.
아버지가 무서워하는 것은 귀신보다 사람이었다.
귀신은 사람에게 절대 해를 가할 수 없지만 사람은 달랐다.
거짓말로 돌이킬 수 없는 손해를 끼치기도 하고
물리적 힘으로 위해를 가하기도 한다.
 
일제의 영향 때문인지 아버지는 미신을 좋아하지 않았다.
굿을 하거나 점보는 행위를 경멸했다.
조상의 혼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제사를 지내는 것은 조상의 혼이 있어서가 아니라 조상을 공경하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뼈와 살을 물려준 조상을 공경하지 누구를 공경하겠는가!
아버지에겐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른바 예수쟁이들이었다.
있지도 않은 천국을 믿고 교회에 돈까지 바치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건 병이 깊은데 병원치료를 거부하고기도로 병을 고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었다.
선호 당숙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병이 깊어지자 병원치료를 거부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생을 마쳤다.
아버지로선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전생도 믿지 않았다.
죽은 생명이 어떻게 다시 태어난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80년대 대한민국은 저금리 저달러 저유가로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었다.
청량리시장에서 옷가게를 하던 우리 집도 장사가
잘돼 제법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집도 사고 가게도 넓힐 생각에 밥을 안먹어도 힘이 났다 .
마침내 우리도 행복하게 살 일만 남은 것이다.
순풍에 돛단 듯한 배.
그런데 암초가 기다리고 있을 꿈에도 몰랐다.
내가 군에 간 90년대 초 아버지가 사업을 한답시고
그동안 애써 모았던 돈을 한 순간에 다 날려버린 거였다.
어머니는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니 하루에도 수 십번 가슴을 쥐어짰다.
울화병이 도진 것이다.
아버지가 미워 견딜 수 없었다.
마음을 추스릴 수 없었던 어머니는 창미 엄마의 권유로
남묘호렝게교(나무묘법연화경)를 믿었다.
이번엔 형이 난리였다.
왜색종교라 하여 너무나 싫어한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방향을 바꿔 절에 다니기 시작했다.
 
집안을 알거지로 만든 장본인이었지만 아버지는 기가 전혀 죽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만 더 뒷받침 해줬으면 엄청난 돈을 벌었을텐데
그러지 못했다고 오히려 어머니를 원망했다
“부처가 밥을 주냐? 떡을 주냐? 에잇~”
아버지는 어머니와 절을 싸잡아 욕하면서 하루종일 술만 드셨다.
적으면 하루 소주 두 병 많으면 세병이었다.
결국 아버지를 무너뜨린 건 술이었다.
간 기능이 약화돼 간경화가 되고 간암이 되었다.
아버지는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한 번도 초월적 존재를 찾지 않았다.
언젠가 친척 중 한 분이 찾아와 기도를 했는데 그만 두라고 손을 내 저었다.
그 때 아버지가 한 말은 “한 번 가는 인생 다 부질없다”였다.
작은 목소리지만 내 귀엔 똑똑히 들렸다.
20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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