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물 일곱이었던 1994년.
선배의 소개로 학습지에 만화를 연재했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영어 학습지였다.
학습지 발행 주기는 한 달에 세 번.
선배는 학습지 안에 들어가는 삽화를 그렸고 나는 학습지 뒷면에 만화를 그렸다.
허락된 지면은 단 한 페이지.
처음엔 이솝 우화를 몇 편 그렸다.
편집자들로부터 반응이 괜찮았다.
아이들이 재밌게 본다고 했다.
학습지 사장은 내 만화를 칭찬하며 그럼 명작 소설을 만화로 그리면 어떠냐고 물었다.
"아 그럼 <보물섬>을 그려볼까 합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학습지 뒷면에 <보물섬>을 연재하게 되었다
알다시피 <보물섬>은 알다시피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모험 소설이다.
내가 처음 접한 <보물섬>은 소설이 아닌 TV 애니메이션이었다.
중학교 때 방영되었는데 나는 단 번에 이 애니메이션에 빠져들었다.
너무 너무 재밌어서 방영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TV 브라운관 앞에 앉았다.
60이 멀지 않은 지금도 그 때의 그 감동을 잊을 수 없다.
나중에 알았지만 <보물섬>의 감독은 데자키 오사무로 <내일은 죠>와
<베르사유의 장미>를 그린 것으로 유명했다.
이 분 애니메이션의 특징은 중간에 한번씩 정지되곤 하는 화면이었다.
음향과 함께 거칠게 표현된 그림은 정말이지 강렬했다.
극적 긴장감을 이처럼 강하게 불러일으키는
애니메이션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본 적이 없다.
그 <보물섬>을 그리게 된 것이다.
당연한 수순으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원작 소설을 사서 읽었다.
허락된 지면은 단 한 페이지.
연재처가 없던 내겐 너무나 소중한 지면이었다.
내용을 최대한 압축해 표현하는 것이 지상과제였다.
입시 미술을 하지 않았던 내게 수채화는 공포다.
채색에 자신이 없었다.
컴퓨터로 채색하면 되지 않냐고 묻는 이도 있겠지만 컴퓨터가 보급되지 않던 시절이다.
죽으나 사나 수채화 물감으로 채색을 해야만 했다.
작업 과정은 이렇다.
소설을 읽으며 콘티를 짠다.
스코틀랜드지(종이의 일종)에 데생을 하고 펜터치를 한 뒤 채색을 한다.
전철을 타고 학습지 회사로 가 원고를 넘긴다.
이어 경리에게 한 회분 원고료를 받는다.
계좌 이채가 아닌 현금이었다.
그렇게 한 회 한 회 원고를 넘겼고 마침내 41회로 연재를 마쳤다.
이야기를 풀어가기엔 턱없이 부족한 지면이지만 그럼에도 끝을 맺긴 했다.
작품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끝을 맺는다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시작이 아무리 좋아도 끝을 맺지 않으면 평가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위안을 삼는 지점이다.
연재가 끝난 뒤 다른 작품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한 페이지 안에 이야기를 담아내는 건 적지않은 스트레스였다.
원고료도 너무 작았다.
마침 지면에 목말라 하는 후배가 있어 바톤 터치를 했다.
후배 역시 명작 소설을 만화로 그렸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만화!
당시 학습지를 보던 아이들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무심히 한 번 보고 말았을테니.
그러나 작가는 다르다.
이 원고를 그리기 위해 땀을 흘리며 보냈던 시간이 있다.
비록 세상에 빛을 볼 일 없는 원고지만 깨물어 아프지 않는 손가락은 없다고 했다.
개인적으로는 나름 의미가 있는 작업이다.
아쉽게도 원본이 되는 원고는 챙기지 않았다.
대단한 것도 아닌데 달라고 하기가 뭣해 학습지만 받았다.
다행히 당시 발행된 여느 학습지들과는 달리 인쇄가 잘돼 있는 편이다.
나는 지금까지 해온 작업들을 데이터베이스화 한다.
나 아니면 챙겨줄 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후회가 밀려온다.
스캔을 하고 포토샵으로 조정을 하는게 보통 일이 아니다.
시간이 통째로 날아간다.
후회막급이지만 한 번 시작한 일이라 멈출 수가 없다.
삼십이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보는 원고는 부족하고 또 부족하다.
무엇보다 독자에 대한 배려가 없다.
지문을 위해 공간을 비워두지 않았다.
오밀조밀한 그림 위에 글씨가 얹혀져 읽기가 힘들다.
독자에게 불친절한 만화다.
색도 문제다.
앞뒤없이 색을 강하게 써 사물의 변별력이 없다.
한마디로 눈이 어지럽다.
지금이라면 색을 좀 더 효과적으로 썼을 텐데 당시엔 그런 노련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원고가 좋다.
땀냄새가 나서다.
원고료와는 상관없이 한 페이지 한 페이지 혼신의 힘을 다해 그렸다.
내 젊을 날을 증거하는 원고를 여기 일부 공개한다.
202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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