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의사를 전하고 싶을 때 우리는 말을 한다.
말을 할 수 없을 땐 손짓 발짓을 동원한다.
하지만 이들 의사소통 도구는 매우 한정적이다.
몸짓은 망막에 사물이 맺히는 거리를 벗어날 수 없고 소리는 진공이 울려 퍼지는
공간을 벗어날 수 없다.
다른 이를 통해 의사를 전하려 해도 한계에 곧 봉착한다.
전달 과정에서 심각하게 왜곡되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며 잊혀지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내 의사를 그대로 전할 수는 없을까?
이러한 고민 속에 인류는 문자를 만들었고 편지를 써서 자신의 의사를 전할 수 있었다.
20세기. 우편통신의 발달로 사람들은 전보를 이용했다.
“부친사망 귀가요망”
부두에서 막일을 하던 하던 A씨는 전보를 받자마자 서둘러 고향으로 향했으리라.
전보엔 군더더기가 없다.
사실을 알리는 용도 외엔 어떤 문학적 수사도 용인되지 않기에.
유선으로만 가능하던 송수신은 무선 20세기 말 이동통신의 발달과 더불어
우리의 일상을 지배했다.
언제든 100자 안팎의 문자 메시지로 자기 의사를 전달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전보와 달리 문자메시지는 문학적 수사가 허용되었다.
100자 안팎으로 쓰는 짧은 글은 일본의 하이쿠는 물론 우리나라 시조보다도 길다.
어떤 이는 문자 메시지로 소설을 쓰기도 한다.
100자 안팎의 문자 메시지.
오늘 당신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나는 시인이며 소설가이고 에세이스트는 아닐까?
ps
아래 그림은 2012년 창비에서 발행하는 고등학교 문학교과서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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