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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티크

에도시대 인백통초(因伯通鈔)

by 만선생~ 2026. 3. 12.

 
 
 
황학동 어느 가게에서 오래돼 보이는 지폐를 보았습니다.
주인에게 물으니 임진왜란 전후에 사용하던 일본 지폐라 합니다.
무려 400년이 지난 이웃나라 지폐가 나돌고 있다니 신기했습니다.
"이거 얼맙니까?"
"두 장에 5만원 주세요"
"2만원에 한장만 살게요. "
"네 그러세요"
보물을 얻은듯 흥분을 감추지 못한 저는 두말없이 돈을 건네었습니다.
옆에 계신 파즈님은 뭘 저런 걸 사냐하는 표정이셨지만요.
뭔가 하나 꽂히면 앞뒤 가리지 않고 사는 성격이라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음에도
지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가게 주인은 지폐에 대해 더이상 아는 게 없는 듯 했습니다.
워낙 수량이 많아 많이 유통된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지요.
집으로 돌아온 저는 이모저모를 뜯어보았습니다.
일단 구글에서 돈 이름인 인백통초(因伯通鈔)를 검색해보니 에도시대 발행한
지폐란 걸 알 수 있었지요.
(마지막 자는 옥편에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도 현재는 쓰이지 않는 한자 같고 또 일본사이트에선 '초鈔'자로 변환해 쓰고 있었습니다.)
 
더불어 지폐에 있는 연호를 검색해보았습니다.
나무위키에 일본 연호가 아주 친절하게 나와 있더군요.
그러니까 享保 十六年은 1731년 이었던 겁니다.
도쿠가와 막부가 토요토미 정권을 무너뜨린지 130년이 지난 시점이지요.
당시 일본의 수도 에도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로 상업이 번창하였습니다.
100만이 넘었다고 합니다.
유럽의 대도시인 런던이나 파리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국 북경보다도 많았습니다.
당시 조선의 수도 한양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가 나지요.
변방이라 생각되던 섬나라 일본에서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인구가 모여 살 수 있었을 까요?
벼농사와 관계가 있었습니다.
10세기 무렵 앙코르와트를 건설한 크메르 제국의 수도 앙코르 인구가 80만이라 했습니다.
벼농사를 이모작은 물론 삼모작 4모작까지 가능했으니 그 많은 인구를 먹여살렸던 것입니다.
앙코르톰과 같은 거대도시와 아코로와트 같은 사원은 이같은 생산력을 바탕으로 만들어
진 것입니다.
몇차례 일본을 가보니 이해가 되었습니다.
관서평야와 마찬가지로 관동평야 또한 엄청 넓었어요.
거기다 이모작까지 가능했다니 그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더하여 참근교대와 같은 이러저러한 우연이 겹쳐 에도는 세계에서 상업이 가장
번창한 도시가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조선에선 상품 거래가 활발하지 않았습니다.
교환수단으로 동으로 주조한 엽전을 썼고 민간에서는 쌀이 주교환 수단이었습니다.
만약 한양 주위가 일본의 관서 관동 평야와 같이 넓었다면우리도 달라졌겠죠.
엄청나게 많은 서적이 거래되고 신문(요미우리)이 발행되고
공연장에선 연일 가부키같은 공연이 이어지고
우키요에란 대량의 판화가 유통되던 도시 에도.
당연 교환수단으로 동전 이상의 것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오래된 지폐를 한장을 통해 에도시대를 엿볼 수 있는 거지요.
역사란 참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쌀 생산력을 바탕으로 번영을 구가하고 또 예기치 않게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팽창을 거듭하던 일본.
한 때는 조선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시아 전부를 차지했고
20세기 말엔 미국까지 위협했더랬습니다. 하지만 부동산 폭락과 함께 힘이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잃어버린 30년이지요.
지금은 식민지였던 한국에게 추월을 당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그렇게도 좋았던 운빨이 끝나고 원전폭발과 올림픽과 같은 악재를 거듭하며
퇴락의 길로 들어선 거지요.
당했던 입장에선 고소합니다.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 하지 않나요.
경계를 게을리 하지않으면서 배울 건 배워나가야겠습니다.
인구 100만의 도시 에도엔 무수히 많은 직업이 있고 그래서 그만큼의 이야기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창작자로선 부러울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한양도 그에 못지 않습니다.
능력이 부족해 살려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요.
무엇보다 한양을 둘러싼 자연의 아름다움은 에도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앞으로 서울이 경제와 문화도시로서 세계의 중심이 되길 기원해봅니다.
 
2021.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