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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할배

by 만선생~ 2023. 10. 23.
 
복지관 수업을 위해 전철을 탔는데 마침 자리가 하나 있었다.
비닐봉투가 올려져 있었지만 빈자리인 건 확실했다.
나는 주인으로 보이는 노인에게 봉투를 치워주십사 요구했다.
"저기 자리가 있으니 앉아"
"저긴 노약자석인데요"
"그냥 가서 앉으면 되지 뭘 그래"
노인은 퉁명스럽게 답하며 봉투에 깨질 물건이 들어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언잖아진 나는 자리를 옮기지 않고 노인을 내려보았다.
노인은 풍채가 좋았고 별모양에 ROKMC가 새겨진 빨간색모자를 쓰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마크 옆으로 정체를 알 수없는 태극기 문양의 배지를
달고 있었다.
티도 빨간색이었는데 모자와 한 셋트로 보였다.
혁대의 버클 역시 모자와 같은 심볼이 새겨져 있었다.
단언할 수 없지만 태극기 부대나 해병대 전우회 멤버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박근혜 탄핵반대 같은 집회가 있을 때마다 나타나는 노인들 말이다.
노인은 자리가 났다며 앞자리를 가리켰는데
그 곳 역시 앉을 수 없는 임산부석이었다.
나는 그대로 자리를 지켰고 노인은 불만어린 말로 뇌까렸다.
" 내 나이 80이 넘었는데 말이야"
노인은 몇정거장 지나지 않아 문제의 비닐봉투를 들고 내렸다.
ROKMC가 궁금해진 나는 인터넷을 검색했더니 해병대가 맞았다.
(Republic of Korea Marine Corps)
나이로 권위를 내세우려는 노인에게서 인정욕구의 메마름을 보았다.
세상이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을수록 잘나가던 젊은시절에 대한 그리움은 커진다.
"우리가 그만큼 했기에 너희가 이만큼이라도 사는 거야"란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태극기집회에 나가든 나가지 않든 상관없다.
다만 사정이 이러니 저리가서 앉으면 안되냐고 양해를 구했으면 아무런 불만을
가지지 않았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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