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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권숯돌 작가를 떠나 보내며

by 만선생~ 2024. 3. 1.

 
 
무슨 말부터 해야 될지를 몰라 썼다 지우기를 반복합니다.
우리들의 소중한 벗 권유선.
또 다른 이름은 권내영이었고 필명은 권숯돌이었습니다.
숯돌은 어린 시절 이마가 까매서 어른들이 붙여준 이름이라네요.
권샘은 1972년 6월 13일 부산에서 태어나 2024년
1월 16일 전라도 강진에서 잠들었습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나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세상을 떠난 지 한 달 반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권샘이 세상에
없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권샘은 왜 우리 곁을 그리도 황망하게 떠나가야 했을까요?
야속하고 또 야속합니다.
지금이라도 웃는 얼굴로 샘~ 하며 반길 것 같은데 말입니다.
권샘을 만난 우리는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겠지요.
권샘과 함께 하는 산책은 얼마나 즐거울까요?
얼마 전 이희재 선생님 내외분과 통화를 했는데 지난 여름 강진 백운동
계곡에서 보냈던 시간을 잊지 못한다 하셨습니다.
계곡은 새소리 물소리 그리고 나무 사이로 비친 빛이 어우러져 환상
그 자체였습니다.
시간을 멈출 수 있다면 그 시간에 속에서 한동안 더 머물고 싶네요.
여기 계신 분들 모두 권샘과의 인연이 각별합니다.
아마도 권샘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영사기에 비친 스크린 화면처럼
떠오르지 않을 까 싶네요.
화면뿐 아니라 음성도 함께 떠오를테죠.
그리움이 배로 되살아나는.
돌아보면 권샘은 매력 그 자체였습니다.
누구라도 권샘을 만나게 되면 권샘의 매력에 빠져들 수밖에 없지요.
내가 생각하는 권샘의 최고 매력 포인트는 말입니다.
말을 얼마나 잘 하시는지 권샘을 처음 본 후배 김한민은 권샘은 우리와
차원이 다른 분이라 하였습니다.
에세이를 그대로 옮겨온 듯 말을 한다고 하더군요.
권샘은 그 나이 때의 여느 여인들처럼 수다스럽지 않습니다.
조분 조분 말을 이어가지요.
사실 전 권샘을 만나고 나면 절망감을 느끼곤 합니다.
어휘력 부족을 실감하면서 말이지요.
특히 권샘이 했던 말을 누군가에게 전하려 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권샘이 했던 표현이 떠오르지 않아서요.
답답해 미칠 지경입니다.
권샘은 흔한 말로 가방끈이 깁니다.
하지만 현학적인 말을 전혀 쓰지를 않아요.
그러면서도 표현이 아주 적확합니다.
그래서 나는 권샘을 일컬어 여자 유시민이라고 농담 아닌 놈담을 하기도 했지요.
권샘은 일본 생활을 할 때 영어를 가르치며 생활비를 벌었다 합니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 피아노교습을 받기도 하고 도자기 공부도 하였다지요.
주말엔 조선인 학교에 가 장구를 쳤다고 합니다.
풍물놀이를 통해 민족 공동체가 유지되기를 바랬던 거지요.
무엇보다 권샘은 그림을 잘 그렸습니다.
미술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미술학원을 다닌 것도 아닌데
어찌 그림을 그리 잘 그리는지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테크닉과는 거리가 멀지만 진심을 다해 그리는 그림.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권샘의 그림에 빠져들었습니다.
열렬한 팬이 되었던 거지요.
그로인해 권샘을 만나기에 이르렀고요.
권샘은 화가이기 전 문청이었습니다.
대학시절 문학 동아리 활동을 하며 시를 썼다고 해요.
1987년 6.10 항쟁으로 군사반란세력이 위기를 느껴 6.29 선언을 했지만
이 땅은 동토였습니다.
꽁꽁 얼어붙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대학가는 날마다 학생들의 시위가 그치지 않았지요.
91학 번인 권샘도 시위 행렬에 서서 반독재 구호를 외쳤습니다.
이른바 운동권 학생이었던 겁니다.
대학을 졸업해서는 우연찮은 기회에 KBS와 연이 닿아 방송작가로
활동하였습니다.
그 무렵 권샘은 도박벽이 심한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고 해요.
그렇게 해서 떠난 것이 일본 유학입니다.
이후 20여 년 동안 일본에서 생활을 했던 거지요.
한국 사람이 많이 살고 있는 오사카나 도쿄가 아닌 오미하치만이란
교토 근처의 소도시에서 말이죠.
권샘은 늘 고국강산이 그립다 하였습니다.
생태적 삶을 꿈꾸었지요.
한국의 정치 상황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 땅에 민주화가 완전하게 뿌리내리지 못함을 안타까워했고 검찰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 분노했습니다.
그 같은 관심으로 인해 2022년에는 여기 계신 박향미 작가님과 “이재명의
꿈”이란 책을 내기도 했지요.
운명일까요?
권샘은 만화와도 인연이 깊었습니다.
본인이 만화를 즐겨본 건 아니지만 알 수 없는 힘이 자꾸만 만화로 이끌었습니다.
시아버님이 만화광으로 방안이 만화로 가득차 있고
남편 역시 만화광이라 합니다.
어린 딸 주나도 아빠만큼이나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보는 것만큼이나 그리는 것에도 흥미가 있어 장래 희망이 만화가라 합니다.
어쩌면 세월이 흐른 뒤 가와구치 주나의 작품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 계신 사촌동생인 권기현 선생 또한 만화인입니다.
만화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운명인 게지요.
2021년 중앙대학교 다문화 콘테츠 연구소에서 권샘에게 작품을 의뢰했습니다.
“문화다양성을 배달해 드립니다.”란 책자인데요.
권샘과 권기현 선생은 세 개의 작품 가운데 각기 한 작품씩 맡아 그렸습니다.
만화 스토리 작가를 넘어 만화가로도 데뷔를 한 셈이지요.
권샘과 나의 협업은 권샘이 일본 생활을 할 때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날 단편 스토리 두 편을 제게 메일로
보내왔는데 저는 그 중 한 편을 콘티로 그려보았습니다.
다만 이런 저런 일들로 인해 작업은 더 이상 진척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성남 문화재단으로부터 저에게 작품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독립운동가 웹툰 프로젝트인 거지요.
저는 권샘에게 스토리를 써보라 제안했습니다.
권샘이라면 충분히 쓰실 수 있다고 생각을 했던 거지요.
그렇게 탄생한 것이 2020년 8월 휴머니스트에서 출간한 “의병장 희순”입니다.
작가인 제 스스로 뿌듯해하는 작품이지요.
협업하길 정말 잘했다 싶었습니다.
이후 조정미 선생을 통해 남북역사협의회에서 의뢰받은 5회 분량의
웹툰 ‘만월대 이야기’를 함께 했고 북 21 출판사에선 “1592 진주성”
작업을 함께 했습니다.
1년 8개월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그렸던 원고.
출간이 멀지 않은 이 때 별안간 세상을 떠나니 황망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작가에게 가장 즐거운 일이 뭘까요?
제겐 작가 강연과 더불어 책거리입니다.
책거리는 책이 나온 뒤 작업에 참여했던 작가와 출판사 직원들이 식사를
함께 하며 자축하는 건데요.
기분이 내키면 2차에 이어 3차로 노래방까지 가는 그런 코스.
그 날을 손꼽아 기다렸건만 그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생각지도 않게 유작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앞으로 함께 작업할 기회 역시 영원히 사라져버렸고요.
만화가인 저로선 좀 서운한 일이지만 권샘이 살아생전 가장 애착을
가졌던 건 아마도 시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권샘은 앞서 말한대로 대학 시절 문학 동아리에서 활동하며 시를 썼는데
시위 현장에서 자신의 시가 누군가에게 격문으로 읽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지요.
권샘은 오랫동안 시를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유학생활에 또 아이를 낳고 하다 보니 시 쓸 생각을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극도의 불면 상태가 한동안 이어졌는데
이 때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해요.
권샘을 알게 된지 일년 쯤 지났을까?
권샘은 자신이 쓴 시들을 저에게 보내주었습니다.
시를 잘 모르는 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요.
메모장에 저장한 시들을 건성으로 한 번 읽어본 뒤 다시 열어보지를 않았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황망히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메모장을 두 번 다시 열어보지 않았을 겁니다.
다행인 건 그 때 메모장에 저장해 둔 시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거예요.
시를 모두 갈무리 해보니 총 61편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시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는 것들도 몇 편 있었고요.
며칠 전 후배 한정우가 뜻하지 않은 제안을 하였습니다.
권샘과 사귄지는 얼마 되지 않으나 권샘과 속깊은 얘기를 많이 나눈 정우였습니다.
정우가 말하길 권샘의 유골이 뿌려진 곳에서 멀뚱 멀뚱 있다가 오기엔 너무 허망하다.
기억에 남을만한 이벤트를 하자.
그 것이 망자에 대한 예의다.
그래서 생각 난 것이 시 낭송입니다.
권샘이 그래서 꺼내든 것이 권샘이 쓴 시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여름 동백’이란 시입니다.
여름 동백
여기도- 百済가 있다
물길이 길러낸 이끼를 즈읍즈읍 밟고
다시 돌아가리라 약속도 없이
켜켜한 돌계단을 올라
찢겨진 비단을 두르고
향내를 애써 죽인 채
수천년 기다림을 헹구고 씻은
여름 동백 하나
선운사 유린(乳輪) 지고 난 후에도
붉은 물기를 꼬옥 짜
희디흰 젖가슴으로 피어났다면
다음 初夏엔 찾아와 주실런지요
섬나라
백제사(百済寺)
노각나무
히메 샤라(姫沙羅)※를
헤메 샤라는 여름동백의 일종이나 보다 작고
가늘며 6-7월에 은은한 향기의 흰꽃이 많이
피어 일본 시가현의 백제사에서 유명한 나무라 합니다.
한 편으론 서운하니 한 편 더 낭독하겠습니다.
보름달 아래서
호수에 달이 진다고
가득 채워버려서
이지러진다고
궁싯거릴 것 없다
목놓을 것 없다
휘엉청 차올랐던 것들은
흔쾌히 질 줄 알테지
너로 인해 물결도 야위어 가고
너를 위해 달도 둥글어 진다
변할 수 있으니 사랑일테지
스스로를 태우느라
작열했던 시간이 가라앉는다
식은 후에야 굳은 뒤에야
갈아낼 수 있는 것
풀벌레 소리
쓰륵 스윽 어둠을 벼리면
날선 달의 심장 한끝자락
어디선가 빛나며 떠오를테니
이상으로 추도사와 시낭송을 마칩니다.
이별은 가슴 아프지만 그렇다고 영영 붙잡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다만 각자의 자리에서 권샘을 기억하면 될 것 같아요.
우리들의 벗 권유선.
잘 가시라.
언젠가 우리들도 가게 될테니 그 곳에서
웃으며 만납시다.
젊어 세상을 떠난 권샘은 늙어 세상을 떠난 내게
이런 말을 할 것 같아요.
“정샘 많이 늙으셨네요~”
* 올린 그림은 권샘 작품으로
일본 소도시 오미하지만에 있는 작은 운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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