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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내 마음의 학급 문고

by 만선생~ 2024. 7. 26.
내 마음의 학급문고
 
선생님께서 자기소개를 반친구들 앞에 하라 했을 때 심장은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떨렸다.
무슨말부터 어떻게 해야하는 거지?
"예 저는 전라북도 김제군 용지면 와룡리에서 올라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한번도 한 적없은 자기 소개를 마친 뒤 선생님께서
가리킨 빈자리에 앉았다.
교실은 시골학교와 달리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했다.
오전반 오후반이 있었다는 소리도 들렸고 45번까지 있던 번호는 무려 72번
까지 있었다.
분위기가 시골학교와는 전혀 달랐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하얗고 옷차림도 깔끔한데다 실내화를 신고
있었다.
말투 역시 시골말과 달리 세련돼 보였다.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서울.
학교생활 역시 낯설어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어야할 지 몰랐다.
 
기실 나는 말이 없는 아이였다.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와중에도 나는 조용했다.
아이들과 어떻게 어울려야 할지 몰랐고 그래서 한동안 친구가 없었다.
그 때 눈길을 끌었던 것이 학급문고였다.
창가 창문턱으로 올려져 있는 작은 책꽂이.
그리고 책꽂이에 꽂혀있는 스무권 남짓한 책들.
그 때까지 교과서 외엔 이렇다 할 책을 읽어본 적 없던 나는 이내 책장
속으로 빠져들었다.
책은 내가 살고있는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
 
책장을 넘기며 장난꾸러기 톰소여와 허클베리핀을 만나고 무인도에 표류한
열다섯명의 소년을 만났다.
인도에서 영국 사립학교로 전학와 선생님과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금발의 소녀를 만났다.
부모님의 사업실패로 대장간지기인 시골 할아버지 댁에 내려온 사내 아이를
만났다.
 
등교이후 1교시 수업을 기다리는 동안은 오로지 책과 함께였다.
쉬는 시간에도 책을 읽었고 수업시간엔 교과서 아래 숨겨놓고 책을 읽었다.
저학년 때부터 명작소설을 읽고 자라난 아이들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독서량이지만 나는 학급문고를 통해 문화적 허기를 달랠 수 있었다.
이후 책을 읽는 습관이 자연스레 몸에 붙었다.
만화책은 말할나위 없고 활자로만 책들도 꾸준히 읽었다.
특히 추리소설과 역사소설을 좋아했고 스무살이 넘어선 틈틈히 시와 사회
과학서적을 읽었다.
그렇다고 독서이력이 대단한 건 결코 아니다.
각종 매체를 통해 식자들이 인용하곤 하는 동서양 고전 가운데 읽은 것은
손에 꼽을 정도.
한국문학전집과 세계문학전집에 수록된 작품을 읽은 것도 몇 안된다.
만화책도 그리 범위가 넓지는 않아 만화인이라면 반드시 봤을법한 아기공룡
둘리,슬램덩크, 짱구는 못말려 등등의 작품도 못봤다.
독서의 폭이 넓지 않은 이유는 첫째 읽는 속도가 아주 느리고
둘째 취향에 맞는 것만 골라 읽는 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부터 시작된 책읽기 습관으로 손을 뻗어 닿을 수
있는 거리엔 항상 책을 비치하고 전철을 타거나 여행을 떠날 때 역시 책을
꼭 챙긴다.
혹 읽지 않더라도 가방안에 책이 있어야 비로소 안심이 된다.
책을 읽는 행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지만 책이 있어 이만큼
이라도 살고 있단 생각이 든다.
 
만약 책읽기를 등한히 했다면 정가네소사 같은 만화를 그릴 수도 없었을
것이고 중앙일간지에 내 기사가 실리거나 공중파 방송에 내 모습이 전파를
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지금 하고 있는 작업 역시 불가능했을 것이다.
지금의 페이스북 친구들 역시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6학년 12반 창가에 비치되었던 학급문고는 아주 특별하다.
만약 누군가 그게 무엇이었냐 물어본다면 난 주저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 건 내 마음의 보물창고였다고.

2017.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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