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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손글씨

by 만선생~ 2024. 10. 29.

손글씨

 


정치인이 남긴 방명록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오곤 한다.
초등학생이 써도 더 잘 쓸 것 같은 글씨 때문이다.
이런 사람에겐 정치적 식견 따윈 있을 것 같지 않다.
꼭 찝어서 말하면 안철수와 이준석 글씨가 그렇다.
그에 반해 박근혜 전 대통령 글씨는 우아하기 이를데 없다.
글씨만 보면 아주 훌륭한 정치인이었을 것 같다.
한국 서예사에 가장 유명한 이는 추사 김정희다.
그가 창안한 추사체는 최고의 평가를 받는다.
경매 시장에서 추사의 글씨는 동국진체로 유명한 원교 이광사 글씨보다 몇 배나 더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
나도 추사의 글씨를 좋아해 선운사에 있는 백파대율사비 같은 글씨를 한 점 갖고 싶단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그가 쓴 한글은 어땠을까?
제주도 유배생활 중 아내에게 쓴 한글 편지를 본 적 있는데 심히 당황스러웠다.
한글이 모욕당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써도 그보다 훨씬 잘쓸 것 같았다.
그에게 한글은 내용만 전달하면 되는 아주 하찮은 글씨였던 것이다.
영조 때 조선통신사 제술관으로 일본에 갔던 청천 신유한은 해유록이란 여행기를 남기는데 여기 한글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일본인들이 한글에 대해 묻자 세종대왕께서 만드신
아주 신묘한 글자라고 대답을 하는 것이다.
세종대왕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문장 안에 녹아 있었다.
하지만 해유록은 한문으로 쓴 것이고 그가
남긴 한글 글씨를 본 적이 없다.
워드의 보급으로 손글씨를 쓸 일이 없어진 시대다.
하지만 좋은 필치를 갖는 건 중요한 일이다.
예술가라면 더 그렇다.
몇 분의 소설 작가에게 책 사인을 받았는데 안받느니 못하단 생각이 들었다.
좋은 이미지가 확 달아난다.
그토록 좋은 문장을 쓰는 사람이 글씨는 왜 이럴까 싶었다.
스케치 없는 그림으로 세계에 명성을 떨친 작가가 있다.
인간 그렸다고는 상상이 안가는 정말 대단한 그림이다.
나는 두벤 세번 태어나도 저리 그리진 못할 거다.
그런데 그가 그림구석에 쓴 이름 사인을 보고 분위기가
확 깬다.
안쓰느니 못한 것 같다.
신은 한 사람에게 모든 걸 다 주는 건 아닌가 싶었다.
스승님 그림은 운보 김기창이 "당신 만화 그리지 말고 그림 그려" 라고 외쳤을 만큼 뛰어나다.
나 역시 스승님 그림을 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스승님 사인이다.
사인을 보는 순간 그림을 보며 느꼈던 감흥이 사라진다.
낙관만 찍는게 좋겠단 생각이 든다.
그에반해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그림을 보면 글씨와 그림이 참 잘 어우러져 있다.
글씨가 그림의 격을 한결 더 높이고 있다.
만화가들 중엔 이희재 선생님과 박재동 선생님 글씨가
좋다.
그림과 참 잘 어우러져 있다.
그래서 두 분 작가님 책에 사인을 받으려 애쓴다.
사실 나는 둘도 없는 악필이었다.
내가 쓴 글씨가 싫어 공책에 메모를 해도 열어볼 생각을 안했다.
그러다 한겨레 신문에 한컷짜리 만화를 연재하면서
난생 처음 글씨연습을 하게 되었다.
이런저런 글씨를 보며 자꾸만 연습을 하다보니
조금씩 나아지는 것이었다.
이젠 책에 사인을 해도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그림과 그런대로 어울리기 때문이다.
얼마 전엔 글씨 애호가인 안중찬 선생으로부터 내 글씨가 좋다며 정용연체를 상표등록하란 소릴 들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기분은 좋았다.
또 얼마전엔 누군가에게 내 책을 주며 사인을 했는데 글씨가 좋다고 하였다.
역시 기분이 좋았다.
난 반듯하게 잘 쓴 글씨를 보면 바로 호감이 생긴다.
특히 여성일 경우엔 더 그렇다.
지난 1월 세상을 떠난 권숯돌 작가의 필치도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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