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녀석은 나만큼이나 공부를 못하여 꼴지를 다투었다.
반에 운동부원들이 없었다면 정말 꼴지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대회성적이 신통치 않은 운동부원의 존재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하긴 아무리 공부를 못해도 전국대회에 나가 메달을 따면 대학에 들어갈 길이
열려있는 게 운동 부원이었다.
그런 면에서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나았다.
녀석과 나는 공부를 못한다는 것 외에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만화를 좋아하고 그림을 곧잘 그린다는 것이었다.
하교 길에는 여느 녀석들과 마찬가지로 오락실에 가 제비우스와 너구리를 했다.
게임은 모름지기 순발력 싸움이다.
우린 둘 다 기계 조작이 느렸다.
50원짜리 동전을 넣은 뒤 1,2 분만에 게임오버가 되고 말았다.
유행 지난 갤러그를 해도 마찬가지였다.
대신 만홧가게는 우리들의 안식처였다.
돈이 없을 땐 200원 많을 땐 1,000원씩 내고 만화책을보았다.
이현세 허영만 황재 이재학 이상무 등 기라성 같은 만화들이 진열대를 장식했다.
특히 <<공포의 외인구단>>을 발표하여 신드롬을 일으킨 이현세 만화의 인기는
하늘 높은줄 몰랐다.
이현세 만화는 워낙 몰입감이 강해 초기작부터 있는 대로 다 찾아서 읽었다.
이 만홧가게에 없으면 다른 만홧가게를 찾아가 읽었다.
이현세 다음은 허영만이다.
<<무당거미>>란 권투만화를 보느라 있는 돈을
다 털었다.
황재와 이재학이 그린 무협만화도 빠질 수 없었다.
광활한 중국 대륙에서 펼쳐지는 무협 고수들의 사랑과 복수에 마음을 빼앗겼다.
중학교 때까지 최고 인기를 자랑하던 이상무는 인기가
시들해졌지만 그래도 볼만하였다.
고우영 만화 <해동일출>>을 보고나선 가슴이 아려 견딜 수 없었다.
아... 사랑이란 정녕 이런 것인가?
시험이 끝나는 날에는 아이들과 함께 중화극장과 새서울 극장에서 영화를 보았다.
<<터미네이터>>와 <<화이어 폭스>>그리고 재개봉한
<<벤허>>같은 영화가 기억에 남는다.
헌책방에 들르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였다.
보물섬, 소년중앙, 소년경향 등의 만화잡지를 사서
마음에 드는 작품들을 철했다.
녀석의 집은 중화동 한독약품 근처였다.
지금 생각하면 정부에서 주택 공급을 위해 지은 부흥주택이 아니었나 싶다.
비슷한 형태의 집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녀석은 라면을 잘 끓였다.
끓는 면발에 달걀을 풀고 파를 썰어 넣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부모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 프랑스 잡지가 많았다.
녀석은 이해 못할 행동을 많이 했다.
눈이 나쁘지도 않은데 안경을 썼고 여자처럼 눈에 아이라인을 그려 넣었다.
앞머리를 코끝까지 길러 두발단속을 하는 선생들과는 숨바꼭질을 하며 지냈다.
특히 몽둥이찜질로 유명한 영어선생 김철진은 녀석에게 저승사자나 다름없었다.
영어시간이 되면 화장실에 숨어 수업이 끝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녀석은 전교 1등을 하는 정희철과 더불어 김철진의
몽둥이 찜질을 피해간 몇 안 되는 아이였다.
수업시간 내내 어떻게 화장실 냄새를 견디었는지 나는 그 정신력이 놀라웠다.
담임 선생은 별명이 투투였다.
당시 방영 중이던 만화 영화 <<개구리 왕눈이>>에 나오는 투투와 닮았기 때문이다.
생긴 것 답지 않게 가르치는 과목은 국어였다.
담임은 작가 지망생으로서 신춘문예에 응모했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수상에 실패했지만 입상 후보에까지 올랐던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본인이 자랑을 하지 않아도 다른 반 선생들이 너희 담임은 대단한 사람이라고 추켜세웠다.
덕분에 나는 자연스레 신춘문예가 가진 위상을 알게
되었는데 봄이 아닌 가을이나 겨울에 발표가 나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신춘(新春)이 꼭 계절적인 의미로만 쓰이는 게 아님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국어 성적이 안 좋은 이유가 있었다.
담임은 무슨 이유인지 녀석에게 시인이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현실과 괴리 된 삶을 사는 것이 시인인가?
알 수 없었지만 녀석은 적어도 담임에겐 시인으로 통했다.
하지만 녀석은 시를 쓰지 않았다.
나와 마찬가지로 연습장에 그림을 끄적거릴 뿐이었다.
사실 녀석의 그림실력은 신통치 못했다.
만화가가 되기엔 데셍 실력이 많이 모자랐다.
스토리를 잘 쓰는 것도 아니었다.
스토리 작가의 필수 조건인 책읽기는 전혀 하지 않았고 일기도 쓰지 않았다.
당연 스토리가 있는 만화를 그릴 생각은 더더욱 하지 못했다.
다만 유명 만화가의 그림을 어느 정도 따라 그릴 수는 있었다.
딱 거기까지였다.
그림 재능이 조금 있는 엉뚱한 녀석.
내 눈에 비친 친구의 모습이었다.
녀석과 나는 학년이 바뀌면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내 딴엔 녀석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같은 반이 되어 만난 친구와 항상 붙어 다녔다.
한 학년 더 올라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친구를 빼앗겼다는 질투의 감정과 더 이상 엉뚱한 녀석과 어울리지 않아도 된다는
감정이 교차했다.
친구의 친구는 나의 친구가 되기 마련이다.
한데 이상하게 녀석의 친구와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가 않았다.
셋이 만났을 때 녀석이 잠시 자리를 비우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데면데면한
표정으로 내내 있었다.
이상하게 서로를 경계했던 것 같다.
녀석은 학습 지진아인 나보다도 성적이 좋지 않았다.
시험이 닥치면 암기과목이라도 외우고 있는 나와 달리
녀석은 수다만 떨 뿐이었다.
어느 날이다.
나는 학교 행정을 좀 아는 다른 친구로부터 녀석이 학교에 입학한 경위를 들었다.
녀석은 우리들과 똑같이 시험을 쳐서 학교에 들어온 게 아니었다.
아버지가 월남전 상이용사여서 성적이 모자람에도 학교 입학이 허락되었다고 한다.
나는 그제서야 꼴지에 가까운 녀석의 성적이 이해되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고 3이 찾아왔다.
늘상 공부를 하던 아이들은 더 열심히 공부를 했고
성적이 신통치 않았던 아이들은 대학에 가겠다며
수학의 정석과 성문 기본 영어를 보기 시작했다.
나와 녀석은 성적이 워낙 나빠 대학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녀석은 어떤 지 몰라도 나는 그랫다,
운동부원들이 대학에 들어갔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생각나는 것은 끝까지 수업시간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거다.
같은 반 친구들 얼굴도 모를 지경이었다.
꼴찌를 도맡아 해주던 고마운 친구들.
하긴 그리 고마워할 것도 아니다.
입시를 포기하는 아이들이 늘어나면서 나의 성적은
상대적으로 올라갔으니 말이다.
내신등급도 맨 아래는 아니었다.
이제 지긋지긋한 학교생활도 멀지 않았다.
그 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기분이 좋았다.
졸업을 며칠 앞두었을 때다.
녀석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녀석은 누구에게도 아버지의 부고를 알리지 않았다.
장례가 끝난 뒤에야 담담하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했다.
학교를 졸업해서는 이따금 녀석을 만났다.
그 때마다 녀석은 현실이 아닌 4차원 세계를 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녀석의 여전히 앞으로 쏠린 긴 머리에 여자처럼 아이라인을 그리고 다녔다.
희한하게도 매번 자신이 밥값을 내는 것이었다.
나 뿐 아니라 녀석과 친한 아이를 만날 때도 매번 그랬다.
워낙 없이 사니 밥값을 낼 형편도 아니었지만 녀석이 계속 계산을 하는 게 불편했다.
아예 만나지 않는게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돈 나올 구석이 없는데...
어머니가 용돈을 많이 주시는 걸까?
아무튼 알 수가 없었다.
녀석은 상이용사의 외동 아들어서인지 군대가 면제 됐다.
내가 군복무 중 휴가를 나와 보니 녀석은 여전히 같은
헤어스타일에 아이라인을 고수하고 있었다.
나로선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러려니 했다.
그 사이 녀석의 삶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한 만화가 선생의 문하생이 된 것이다.
원고에 얼 만큼 참여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선생과 격의없이 농담을 계속 주고받았다.
나는 안심이 되었다.
녀석이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선생이 말하였다.
녀석의 정신이 온전치 않다고.
녀석의 어머니에게 전해 듣기를 어릴 때 머리를 다쳐 그리 되었단다.
그러면서 만화가로 성공하는 것은 바라지도 않고 그저
거두어만 주면 고맙다는 말을 하였단다.
나는 비로소 녀석이 이해되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한 참 뒤 녀석을 만났는데 녀석은 만화를 그만 두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내게 명함을 주었다.
뜻밖에도 이름을 대면 알만한 문구회사 직원으로 돼 있었다.
다만 무슨 일을 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이후 몇 년의 세월 흘렀다.
오래만에 나타난 녀석은 연예 매니지먼트 회사에 다닌다고도 했다.
믿기지 않았지만 명함엔 분명 그리 쓰여 있었다.
이후 녀석은 간간이 우리 집을 찾았다.
그 때마다 녀석은 내가 좋아하는 여성 스타일을 물었다.
한 참 뜨고 있는 댄스 가수들 이름을 오르내리며 스타일에 맞는 여자를 소개시켜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 번도 소개시켜준 적이 없다.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른 무렵엔 녀석과 소식이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
녀석이 인터넷 검색을 해 나의 존재를 찾아 연락을 해오기전까지는 만날 방법이 없다.
페이스북 검색 창에 녀석의 이름을 쳐보았으나 동명이인들만 나올 뿐이었다.
그래 어딘가에서 잘 살아가고 있겠지.
돌이켜 생각해보니 녀석의 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
어머니도 본적이 없다.
아마도 녀석의 아버지는 물론이고 어머니도 일을
나가셨던 모양이다.
녀석이 어느 날 말하길 병석에 계신 아버지는 대학을 나오지 않아 자기가 대학에 가주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했다.
자식을 통해 못다 한 꿈을 이루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불행하게도 녀석은 아버지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했다.
짐작컨대 당시 녀석의 아버지 나이는 사십대 중반.
고엽제 후유증으로 돌아가셨던 게 아니었나 싶다.
2004년. 한 월간 잡지에 녀석을 소재로 해 2쪽짜리 만화를 그린 적 있는데 제목이 <공포의 바리깡>이다.
녀석이 고교 시절 김철진 선생의 두발 단속을 피해 화장실에서 시간을 보냈던 이야기다.
이 만화를 블로그에 올렸더니 우연찮게 알게 된 고등학교 1년 선배가 이 만화를 보고 자기 때도
김철진 선생이 몽둥이찜질로 유명했다고 한다.
체벌이 일상적이었던 당시와 달리 지금은 체벌이 사라져 통제가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