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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소설

동의수세보원

by 만선생~ 2023. 10. 21.

 

동의수세보원

에피소드 1

전철에서 미모의 여인이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곁눈질로 살짝 만화를 봤다.
눈에 익은 그림체였다.
김경호 작가가 그린 "만화로 보는 사상의학"이었다.
미모도 미모지만 멘탈이 아주 괜찮은 여자란 생각이 들었다.
오래 동안 하위문화로 취급받았던 만화 아닌가!
웹툰이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져 만화에 대한 인식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으나 그럼에도 대중은 공개된 장소에서 만화를 잘 보지 않는다.

순간 언젠가 사귀던 여자에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점심시간을 넘겨 어느 식당에 들어갔는데 밥이 나오는 사이 다니구치 지로의 "느티나무의 선물"을 꺼내 읽었단다.
다니구치 지로는 일본은 물론 유럽까지 이름이 알려진 작가주의 만화가다.
만화를 읽다보면 예술이란 생각이 절로 든다.
그런데 식당 아주머니가 책을 읽고 있는 자신을 힐긋 힐긋 보더란다.
나이를 먹을만큼 먹은 여자가 만화를 보고 있으니 아줌마에겐 그 모습이 생경스러웠을 거란 이야기다.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다 큰 여자가 무슨 만화를..."

마찬가지로 지하철에서 성인이 만화책을 보는 것은 흔치 않다.
소설책은 읽어도 만화책은 잘 보지 않는다.
스마트폰으로 웹툰을 보는 것과는 또 다르다.
스마트 폰은 오로지 자기만의 세계에서 보는 것이고 만화책은 외부로 공개돼 있다.
책장을 넘기면 그 소리가 옆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전달된다.
그런 면에서 김경호 작가의 책을 보고 있는 여인은 아주 특별하다.
다른 누군가의 시선보다 자기 자신의 시선이 중요한 거다.
모르긴 해도 삶도 주체적으로 살아나가지 않을까 싶다.
나는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는 그녀에게 물었다.

"저기요"

"예?"

"저. 이 만화를 그린 김경호 작가는 저와 아주 친한 사이입니다.
원하신다면 제가 사인을 받아 줄 수도 있는데..."
나의 뜻하지 않은 제안에 여인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대답했다.

"정말요? 나 이 작가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물론 상상이다.
공공장소 그 것도 낯선 여자에게 말 걸을 용기가 내게 있을 리 없다.
그렇게 그녀는 김경호 작가의 책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으로 빠져나갔다.


에피소드 2

우리 동네 골목길 모퉁이에 작은 약국이 있다.
그 이름도 정겨운 장미약국이다.
약국에 들어서면 언제나 한약냄새가 난다.
약도 아주 잘 듣는다.
감기면 감기 가려움증이면 가려움증 두통이면 두통 안 낫는 게 없다.
거기다 값도 싸다.
다른데서 3000원하는 인공눈물이 2500원이다.
그날도 눈이 뻑뻑해 지나는 길에 약국 문을 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한약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맡으면 맡을수록 기분 좋은 냄새...

그날도 약국 아줌마는 한문이 가득한 무슨 책을 보고 있었다.
얼마나 열심인지 계산을 끝내기가 무섭게 다시 책을 본다.
책을 잘 보지 않는 시대에 한문으로 된 책이라니.
궁금증이 일어 무슨 책이냐고 물었다.
사상의학에 대한 책이란다.
수십년째 보고 또 보고 있는 책으로 종이가 너덜너덜했다.
제목을 보니 이제마가 쓴 "동의수세보원"이었다.
약국 아줌마 왈 일반인들은 책을 봐도 이해할 수 없으니 송일병 교수가 쓴 만화로 된 사상의학을 보라고 한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아줌마가 소개해준 그 책은 경호형이 그린 "만화로 보는 사상의학" 이었다.

아줌마..
말씀을 하시려거든 김경호 작가의 이름도 말할 것이지...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만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것 같다.
나는 지금 "약현"이란 제목으로 조선시대 한 의원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완전한 픽션인데 혹시 참고가 될까 하여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을 주문해
책장에 꽂아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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