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 이야기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교육을 받고 자란 아버지는 술잔이 가득 채워지지
않았을 때 이렇게 말씀 하시곤 한다.
'이빠이 채우라니께'
"아버지. 이빠이란 말 대신 가득이란 말을 쓰면 더 좋잖아요."
"이 놈의 새끼 쓸데없는 말 말고 잔이나 채우라니까"
이빠이는 일본말이다.
특별히 일본어를 공부해서 안다기보다는 우리말 가운데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빠이 뿐만 아니다.
화가 날 때 으래 쓰곤 하는 '야마가 돈다'란 말이나 기름을 가득 채우라는 뜻의
'만땅' 같은 말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일제로부터 해방 된지 반세기가 넘은 지금까지 일본 말은 여전히 그 힘을 잃지 않고
우리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비단 언어뿐이랴.
우리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법제도가 그렇고 행정이 그렇고 문화가 그러한데...
어린 코끼리 다리에 사슬을 채워놓으면 어린 코끼리는 사슬로부터 벗어나려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코끼리가 자라 사슬을 끊고 달아날 충분한 힘이 생겼을 때 코끼리는
사슬로부터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떠한 노력으로도 사슬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화석처럼 굳어졌기 때문이다
뇌리에 한 번 각인된 관념은 여간해서 바뀌지 않는다.
아버지는 매양 '한국 놈들은 안돼'라고 말씀 하신다.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삼십대 중반을 넘어 후반에 접어든 지금까지 변함없이 하시는 말씀이다.
나는 이런 아버지 영향을 받아 한국 사람은 구제불능 이라고 생각했다.
무얼 만들어도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만들다보니 한국산 제품은 금방 고장 나기 일쑤다.
또 하는 짓거리들은 모래알처럼 제각각이어서 외세에 지배만 당하는 민족이
바로 한민족이었다.
어린 내가 봐도 메이드인 코리아 치고 제대로 된 제품이 없었다.
모든 산지 얼마 안 되어 망가졌다.
특히 만화 도구들이 그랬다.
한국에서 만든 펜촉은 조금만 쓰면 끝이 벌어져 못쓰게 되었다.
음영을 주거나 옷무늬 등으로 사용하는 스크린톤은 종이에 달라붙어 떨어지지가 않았다.
스크린톤을 떼어 다시 옮기려 하면 원고가 들고 올라왔다.
접착력이 너무 세서 원고가 찢어질 지경이었다.
한국제보다 두 배 가까이 비싸지만 결과적으로 일제를 쓰는 게 경제적이었다.
학창시절 선생님들은 입을 모아 말씀하셨다.
조선왕조는 당파싸움으로 날 새는 줄 모르다 결국 외세의 지배에 놓이게 됐다고.
정말 아무리 좋은 점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 말대로 구제불능의 족속이란 생각 밖에 안 들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말을 들을 때마다 왠지 서글펐다.
다름 아닌 아버지도 또 그 아들인 나도 한국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왜 이렇게 아버지는 자신을 자학하고 자기 분신이라
할 수 있는 내게 저주와도 같은 악담을 퍼부을까?
어렴풋이나마 이 같은 의문을 품었지만 어린 나는 어디서도 그 답을 구할 수 없었다.
세월은 흐르고 아이는 자라 어른이 된다.
그리고 아이는 책을 통해 공부를 한다.
나는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지독한 자기 학대는 일제에 의한 식민지 정책으로 말미암아 그렇다는 걸.
아버지는 자기 존엄을 배우지 못했다.
일제는 식민지 백성의 어린 아들 딸들에게 자기 존엄대신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존재인지를 가르쳤다.
아이의 뇌는 스펀지와 같다.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말하면 아무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
아버지는 일제가 원하는 대로 자라고 또 그렇게 평생을 살아온 것이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술이 거나하게 취해 있다.
그리고 한국 놈들은 정말 돼먹지 못한 족속이라고 예의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온 집안을 시끄럽게 한다.
식구들은 귀를 막는다.
이제나 저제나 아버지의 주사가 끝나길 기다리지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애비 말이 말 같지 않은 게야. 자식 녿들도 하나같이 에미 편만 들고.
망조다. 망조.”
자식들이 자신의 말을 무시한 것에 화가 난 아버지는 '고뿌'에 또 한 잔의
술을 채운다.
아버지는 새벽을 넘겨서야 술상을 뒤로하며 잠이 들었다.
일제 강점기, 간이학교를 2년동안 다닌 것이 정규 교육의 전부였던 아버지.
간이학교는 오지마을에 국민학교를 대신해 세운 학교다.
학급 수가 많지 않을 뿐 교과 과정이 국민학교와 똑같다.
아버지를 가르쳤던 것은 일본인이거나 창씨개명을 한 조선인 선생이었다.
이들은 조선 학생들을 황국신민으로서 천황에 멸사봉공 하도록 가르쳤다.
수업도 일본어로 했다.
국어를 가르쳤는데 여기서 국어란 일본어를 가르키는 것이었다.
몸과 마음 모두 꼼짝없이 일본 신민이 될 터였다.
다행이 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의 고집으로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정동호란 이름을 일본식 발음으로 읽을 뿐이었다.
한국 놈들은 안된다며 그렇게 욕을 하면서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걸 평생의
자랑으로 삼았다.
" 아... 이건 또 뭐야? 꼬부랑 글씨로 돼있으니 당최
읽을 수가 있어야지."
영어는 상급학교에 진학을 한 뒤 비로소 배우기 시작한다.
당연 아버지는 '컵'이란 영어 단어가 “고뿌”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신다.
구락부 역시 클럽을 발음하지 못핸 만든 일본식 단어란 걸 모르신다.
그냥 고뿌는 고뿌고 구락부는 구락부일 뿐이다.
오늘. 고장 난 가방을 만지던 아버지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쿠가 왜 이런다냐?
이제 본 게 이거 지꾸자꾸 돼서 가방이 안 닫히는구만.
하여간 중국 놈의 새끼들은 형편없다니까'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일본 제국의 신민으로 살았던 아버지.
아버지는 식민지 조선의 백성답게 지퍼(zipper)를 자쿠라
하셨고 지그재그(zigzag)를 '지구자꾸'라 말씀하셨다.
그래도 오늘은 다행이었다.
고장 난 가방이 국산이 아닌 중국제여서.
그런데 생각해보니 한국 놈들은 종자가 틀려먹었다는
아버지의 말씀이 예전보다는 조금 줄어든 것 같다.
아마 기력이 많이 쇠해지셨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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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인 2004년 10월 무렵 썼던 글.
윤석열을 보면 조선을 천대 만대까지 지배하려 했던
일제의 음모가 무섭다.
일제 감정기 태어난 것도 아닌데 일본 놈보다 더 일본
놈처럼 생각하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