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들의 모임이 있다.
스터디 겸 친목 모임인데 두 달에 한 번 만나 공부도 하고 정보도
교환하는 자리다.
두문불출하던 만화가 정씨도 이번 모임에 참가했다.
스터디가 끝나자 예외없이 술자리가 시작됐다.
동료만화가 김씨가 회비라며 만원씩 걷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만화판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니
시간은 어느덧 아홉시.
술값이 회비를 초과하고 있었지만 초과되는 금액에 대해선
아무도 이야기 하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 그런 얘기를 꺼낸다면 상황파악 못하고 분위기나 깨는
아주 쪼잔한 사람으로 남을 것이 틀림 없었다.
아홉시 십분.
동료만화가 윤씨가 마감이 있다며 자리에 일어섰다.
술값에 대해선 얘기가 없었다.
기실 윤씨는 술을 입에 대지도 않아 술값을 내라할 수도 없었다.
열시가 되자 부부만화가인 최씨와 금씨가 애들 밥을 줘야한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역시 술값 얘긴 없었다.
열한시엔 선배만화가 이씨가 마감이 있다며 자리에 일어섰다.
선배는 자기 술값이라며 이만원을 놓고 갔다.
어떠한 자리에서도 자기가 마신 술값은 계산하고야 마는 선배
만화가 이씨였다.
그로부터 십분 뒤 후배만화가 조씨가 여자친구가 급히 부른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앉아있던 동료만화가 김씨가 술값은 놓고 가라하자 지금
돈이 없다며 다음에 산다고 했다.
열한시 반이 되어선 후배만화가 박씨가 외박했다간 마누라에게
쫓겨난다며 차시간이 끊기전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며 옷가지와
가방을 챙겼다.
그러면서 요새 자기 주머니 사정이 안좋으니 술값은 다음에
내겠다고 한다.
남아있는 건 술꾼으로 이름높은 스토리 작가 유씨와 까마득히
어린 여자후배 만화가 한씨와 오씨.
술자리가 파한 건 새벽 다섯시 반으로 차가 다니기 시작할 시간이었다.
만화가 정씨는 머리속으로 술값을 계산했다.
선배된 입장으로 까마득히 어린 한씨와 오씨에게 술값을 내라
할 수는 없고 부모덕에 그나마 경제사정이 괜찮은 유씨와 술값을
나눠 계산하면 큰 부담은 아닐 듯 했다.
"이런 깜박하고 카드 안가져왔네"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유씨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하지만 만화가 정씨에겐 큰 일이었다.
정씨는 까마득히 어린 한씨와 유씨를 곁눈질로 봤다.
이제 막 만화를 시작해 돈도 없거니와 당연히 술값은 선배들이
내줘야한다는 표정이었다.
할수없이 만화가 정씨는 회비로 걷은 금액의 네배에 이르는 금액을
카드로 긁었다.
출판사와 계약을 맺어 진행하는 작품도 연재하는 매체도 없는
만화가 정씨.
수입이 전무한 그는 속이 더 쓰렸다.
진작 남들처럼 마감이 있다며 자리에서 일어날 걸...
일행과 헤어져 전철로 향하는 만화가 정씨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래서 내가 두문분출하며 모임에 나오지 않았던 건데..."
2023.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