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 국내

나주 설재 서원

by 만선생~ 2024. 1. 12.

 
한국족보의 90%는 가짜라고 한다.
거꾸로 말하면 10%만이 진짜란 뜻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살면서 자기가 아전의 후손이라거나 천민의 후손이란
사람은 만나보질 못했다.
모두가 뼈대있는 양반이라 한다.
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김수로왕이든지 박혁거세같은 유명한 시조와 만나게 된다.
전체 인구에서 지배계층인 양반의 비율은 어림잡아 10%내외다.
조선후기 신분질서가 아무리 흐트러졌다해도 양반의 수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모순이다.
한정된 양반의 수와 모두가 양반의 후손이라 기록된
족보 사이엔 건너지 못할 강이 있는 것이다.
나역시 우리집 족보를 의심한다.
과연 양반이 맞는가?
21세기 과거 조상의 신분은 아무 의미가 없지만
그럼에도 확인 해보고싶다.
설사 족보가 위조되었더라도 실망하진 않을테다.
양반이 되고싶어하던 조상들의 열망을 나는 이해할 수
있다.
조선후기 일어난 사회현상의 하나로 받아들인다.
사실 나의 조상이 중인이나 천민이란 확증지을 수 있는 실마리가 없다.
되려 정자관을 쓴 증조할아버지의 사진과 할아버지가 남긴 필적을 통해 양반의 지위를
어느정도 유지했음을 알 수 있게한다.
아버지 말로는 증조할아버지가 일년에 300석을 거두어들였다 한다.
하님이라 부르던 머슴들을 부렸다고도 한다.
그러니까 양반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는 유지하며 산 셈이다.
문제는 장자상속 원칙에 의하여 거개의 재산을 첫째 자식에게 물려주었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 할아버지는 셋째였다.
따로 먹고살 방도를 강구해야했지만 할아버지는 경제적으로 무능력했고 아버지를
가르칠 의지도 없었다.
그래서 울 아버지가 받은 교육은 일제강점기 간이학교 2년이 전부였다.
아버지 또한 경제적으로 무능력해서 우리 형제들을
가난의 질곡으로 몰아 넣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자신이 나주정씨 일헌공파의 일원임을 자랑스러워 했다.
그리고 시조인 정가신 선생의 시를 잊지 않고 읊조렸다.
海東南有錦城山(해동남유금성산)
바다 건너 東쪽의 남녘에 금성산이 있는데
山下吾廬草數間(산하오려초수간)
산 아래에 초려 두어 칸은 우리 집이네.
巷柳園桃親手種(항류원도친수종)
산의 복숭아는 손수 내가 친히 심었으니
春來應待主人還(춘래응대주인환)
봄이 오면 응당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겠지.
안타깝게도 우리 자식들은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극도의 경제적 궁핍은 참을 수 있어도 주사는 정말이지 참기 힘들었다.
고백하자면 아버지가 빨리 돌아가셔서 집안이 조용해지길 바랬다.
자긍심 따윈 털끝만큼도 가질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큰 형은 실날같은 희망 하나를 붙잡았다.
족보였다.
현실의 참담함을 명문가의 후손이란 정신승리법으로 극복했다.
곧 죽어도 나주정씨 시조인 설재 정가신 선생의 피가 흐르고 있다 생각했다.
그러니까 절대 좌절하면 안되었다.
그 힘으로 큰형은 언감생심 꿈도 못꾸었던 대학에 들어가고 박사학위까지도
받을 수 있었다.
학력 컴플렉스에서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노력은 본인으로 끝나지 않았다.
부창부수라고 형수도 박사학위를 따고 조카들 역시
대학원에 진학시켰다.
나아가 유명한 서예선생께 붓글씨를 배운 큰형은 여덟폭 병풍에 설재
정가신 선생의 시를 썼다.
벽엔 선생의 시를 표구해 걸어 놓았다.
어쩌면 큰형에게 설재 선생은 조상 그 이상의 의미였는지도 모른다.
족보가 맞다면 우리 형제들은 설재선생의 27대손이다.
그분의 피가 나의 혈관 속에 흐르고 있다.
그리하여 나는 언젠가 큰형이 조카들을 데리고 찾았던 설재서원을 한번 쯤
가보고자 마음 먹었다.
설재선생은 충선왕의 스승으로 원나라 수도인 연경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한편의 시를 썼다.
앞서 이야기한 그 시다.
시 첫머리에 나오는 금성산은 나주에 있다.
선생을 배향한 설재서원은 그 산아래 있고.
2022년 1월.
오십대 중반의 나는 본관인 나주를 처음으로 찾았다.
늘 지나치기만 했던 고장.
나주를 찾은 목적은 만화 동료를 만나기 위해서이고 둘째 목적은 설재서원을 찾기위해서다.
동료의 집에서 하룻밤을 잔 난 마침내 동료들과 함께 설재서원을 찾았다.
한국 족보의 90%가 가짜임를 떠올리며.
 
 
2022.1.8 

'여행 국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논산 미내다리  (1) 2024.01.14
고양이 카페 '냥반'  (1) 2024.01.14
경복궁 칠궁  (0) 2024.01.12
강원도 여행  (1) 2024.01.01
명동 성당  (0) 2023.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