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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copyright

by 만선생~ 2024. 4. 4.

copyright
책 첫 페이지 혹 마지막 페이지 정보란엔 카피라이트 copyright가 표기돼 있다.
저작물에 대한 권리를 나타내는 국제공용어다.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약했던 80년대엔 카피라이트 표기를 하지 않았다.
대신 저자 인지를 붙여 책이 얼마만큼 팔리는지 알 수있게 하였다.
만약 3000권을 찍었다면 도장을 3000번 찍어야 했다.
책이 몇백권 정도 나가면 별 일 아니지만 몇만권
단위로 나가는 베스트셀러라면 중노동이다.
가족이 나서 도장을 찍어야한다.
행복에 겨운 비명이다.
출판사와 작가의 신뢰가 두터우면 인지 대신 '저자와의 협약으로 인지생략'이란
문구를 써넣는다.
그러함에도 분쟁이 그치지 않았다.
출판사에서 작가에게 판매부수를 속인다는 것이다.
출판사에선 맘만 먹으면 도장 따윈 얼마든지 위조해 붙일 수 있었다.
작가가 전국에 있는 서점에 다니며 위조여부를 가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어떤 작가들은 일정한 금액을 받고 저작자의 권리를 통째로 출판사에 넘겼다.
이를 매절이라 하는데 어떤 면에선 속이 더 편했다.
얼마나 나갈지 모르는 불확실성보다 눈앞에 있는 확실한 돈이 더 중요하였다.
하지만 구름빵 사건으로 인해 판례가 만들어졌다.
매절계약을 한 뒤에도 저작권이 완전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음대로 편집 가공해서도 안되고 수익의 일정부분은 작가에게 귀속되어야 했다.
만화 역사에서도 작가들은 언제나 을이었다.
판매부수를 속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럼에도 인지를 붙이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주는대로 받아야했다.
작가가 권리를 찾는 길은 작업을 중단해 몸값을 높이거나 출판사를 옮기는 것밖에 없었다.
좀 더 대우가 좋은 쪽으로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출판사에서 작가를 뺏기지 않으려면 그만큼 대우를 해주어야 했다.
어제 우연팒게 '만화가 맹상수 이야기'란 유튜브 채널을 보게 되었다.
초창기 선배 만화가들에 대한 이야기여서 굉장히 흥미로웠다.
그 가운데 6~70년대 "조국을 등진 소년"이란
작품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이근철 선생님 인터뷰가 있었다.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희미하던 그래서 자신이
그린 원고조차 챙기지 않던 시절 선생님은 저자 인지를 붙였던 것이다.
한국 만화사에 아주 특별한 일이었다.
아마도 최고 인기작가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
않았을까 싶다.
당시 만화가들은 인기가 있어 수입이 많아지면 술집에 가 돈을 쓰지 바빴단다.
자연스레 인기 작가들과 어울려 술집을 전전했다.
인생의 휘날레를 그렇게 장식했다.
하지만 이근철 선생은 누구와 어울리지 않고 작업에 열중했다.
그리고 돈이 생길 때마다 땅을 사두었다.
대한민국의 경제는 부동산으로 시작해 부동산으로 끝났다.
땅값이 오른 건 불문가지다.
선생은 큰 돈을 벌었고 지금도 풍족한 삶을 살고 계신단다.
이제 이근철 선생하면 멋진 만화를 그린 작가란 생각과 함께 저작권이 떠오른다.
"정가네소사"를 비롯한 내 책들에도 카피라이트가 표기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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