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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단상

이희재 '나 어릴 적에'

by 만선생~ 2024. 3. 29.

 
 
이희재 '나 어릴 적에'

 

2009년 만화의 날 한국만화박물관 2층에서 이희재 선생님 전시회가 있었다.
전시는 경기도지사 김문수가 오는 등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지자체 장이 온다고 해서 특별하게 생각할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만화의
사회적 위상이 올라간 것 같아 뿌듯했다.
만화는 인쇄된 책을 통해 독자와 만나는 예술 장르다.
그림이지만 회화와 다르고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소설과는 다른 매체다.
굳이 가까운 예술 장르를 찾으라면 영화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영화와는 또 다르다.
영화는 영사기를 통해 관객과 만나고 만화는 책을 통해 독자와 만나니 말이다.
만화가가 전시를 통해 독자와 만나는 일은 흔치 않다.
왜냐면 전시는 화가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화가는 전시를 통해 자기를 알리고 그림을 판매한다.
만화가는 이미 출판을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기 때문에 전시가 필요하지 않았다.
사람은 빵만으론 살 수가 없다.
과일도 먹고 고기도 먹고 음료수도 마시며 산다.
만화 역시 출판이 전부는 아니다.
때론 전시를 통해 독자와 만나기도 한다.
만화에 대한 위상이 높아질 수록 전시에 대한 욕구도 커지는 것 같다.
왜냐면 독자는 작가를 직접 만나고 싶고 또 책으로만 봤던 원화를 직접 보고 싶으니.
한국 만화사에 이희재 선생님은 특별한 존재다.
심심풀이 오락이라고만 생각했던 만화를 한 차원 높은 것으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이희재 선생님은 만화광장에 발표한 중,단편 만화를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사회를 돌아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른바 리얼리즘 만화의 탄생이다.
그리고 그 작품들을 모은 것이 "간판스타"란 책이다.
예술에서 내용과 형식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
한 때 운동권 일부에서 내용만 있으면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기도 하였다.
만화를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밖에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간과하고 있는 것이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형식이 더더욱 중요하단 점이다.
리얼리즘 만화가 이희재.
이희재 선생님의 만화는 내용만큼이나 형식이 빛났다.
한 번 보면 절대 잊혀지지 않는 선생님의 독특한 화풍은 한지를 만나면서 엄청난
화학작용을 일으켰다.
펜과 잉크로 그린 것보다 원고가 더 깊고 따듯해졌다.
전시된 원고를 보는 순간 이 것이 예술이구나 싶었다.
전시를 돌아본 뒤 나는 하루 빨리 한지로 그린 작품이 출간되길 바랬다.
특히 선생님의 유년시절을 그린 작품이 보고 싶었다.
삶이 시작되는 어린 시절이야말로 작가에겐 보물 중 보물 아닌가!
즐거웠던 기억도 아린 기억도 작가에겐 소중한 자원이다.
그리고 그를 끌어올려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도 작가의 몫이다.
2009년 만화박물관 전시로부터 한 참의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선생님의 작품은 유예되고 있다.
그동안 "낮은 풍경"이라는 책이 나오긴 했지만 만화가 아닌 화집이다.
"낮은 풍경" 은 아름답다.
작은 판형으로 인해 스케일이 죽고 인쇄가 색감을 받쳐주지 못해 아쉽지만
그럼에도 애장하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선생님게 사인을 받은 그 책은 내 책장에 고이 잘 모셔져 있다.
선생님은 잔소리꾼이다.
특히 후배인 오세영 선생님께 잔소리를 많이 하셨다.
"세영아. 술 그만 먹고 작업 좀 해라. 작업 좀 해.
이 훌륭한 그림을 만들어놓고 독자에게 선을 보이지 않으면 얼마나 손해냐.
이 건 오세영이란 한 개인이 아닌 한국 만화계의 손실이다."
오세영 선생은 나 역시 사랑해마지 않는 만화가다.
선생의 그림이 너무 좋아 적지 않게 베껴 그리기도 하였다.
누가 내게 영향을 가장 많이 준 만화가가 누구냐
묻는다면 오세영 선생이라고 답할 것이다.
하늘은 한 개인에게 모든 걸 주지 않는가보다.
한국 만화사에 별처럼 빛났던 오세영 선생은 2016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훌륭한 그림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만약 선생이 살아 작업을 계속 했더라면
우리는 얼마나 더 행복해져 있을 것인가?
선생의 책을 넘길 때마다 선생이 보여주고 있는 예술성에 손이 파르르 떨릴테다.
정말이지 한국 아니 세계 만화사의 손실이다.
나는 이희재 선생님 내외분과 친하다.
후배로서 존경하고 사랑한다.
마음속으로 의지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선배 만화가이기도 하다.
나는 늘 선생님의 건강이 걱정이다.
선생님께서 늘 건강하시고 오래 오래 작업을 해나가시길 빈다.
그리고 가끔 잔소리를 한다.
선생님께서 오세영 선생께 했던 그 잔소리다.
저토록 훌륭한 그림이 오랫동안 독자와 만나지 못하고 있는게 너무나 안타까워서다.
"시장에서 유통이 돼야 할 것 아닙니까?"
나는 선생님 어린시절을 그린 "나 어릴 적에"가 하루 빨리 책으로 나와
읽히길 바란다.
선생님께서도 이미 수차례 의지를 밝히셨으니 그리해주실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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