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전철역 3번 출구에서 작업실로 올라가는 언덕길.
약 300m쯤 되는 이 언덕길을 오르다보면 나도 모르게 숨이 찬다.
마치 나의 신체 능력을 시험하는 듯.
하루 종일 작업실에 쳐박혀 있는 날을 제외하곤 꼭 하루 한 두 번 이
언덕길을 오르내린다.
공과금을 내러 은행에 갈 때도 인공눈물을 사기 위해 약국에 갈 때도
닳아서 구멍이 난 옷을 꿰매러 옷수선집에 갈 때도 이대로 산책을
갈 때도 또 손님을 맞으러 나갈 때도 이 언덕길을 오르내리지
않을 수 없다.
작업실 동료들과 작업실에 찾아오는 손님들은 한 결 같이 말한다.
언덕길이 너무 높다고.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나마 고갯길이라도 있으니 최소한의 운동을 하며 산다고.
장애가 있거나 걸음조차 떼기 힘든 노인이 아니라면 언덕길은 오히려
건강을 다지기 위한 아주 유용한 도구라고.
그리고 끝으로 일체유심조란 말을 곁들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이 언덕길이 싫을 때가 있다.
몸이 천근만근 피곤할 때 이 언덕길을 오르노라면 마치 내가 고선지
장군을 따라 파미르 고원을 넘는 병사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이역만리 머나먼 땅을 정복하기 위해 원정길에 오른 병사 말이다.
꾸역꾸역 언덕길 3분의 2쯤 올랐을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고선지
장군의 목소리.
“조금만 힘내라. 저기 언덕만 넘으면 작업실이라고.”
언덕길은 내게 최소한의 신체능력을 유지시켜줄 뿐 아니라 생태학습의
장을 제공한다.
저 차가운 시멘 콘크리트 사이에서 무려 10가지가 넘는 나무와 풀들을
사시사철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도심 어디서나 볼 수 있으나 쉽게 지나치곤 하는 나무와 풀을 보노라면
그 질긴 생명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론 애처롭기 그지없다.
이 척박한 땅에서 뿌리내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들의 운명...
오늘 언덕길을 오르며 작업실에 이사 온 이후 처음으로 나무와 풀들의
가지 수를 헤아려 보았다.
나무-메타세콰이아. 주목. 라일락. 가죽나무. 능소화. 대추나무.
향나무. 쥐똥나무. 회양목. 사철나무
풀 - 까마중(먹때왈). 매발톱꽃. 달개비. 국화 서양민들레. 미국자리공.
고들빼기. 질경이
2012.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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