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안돼 삽화로 밥벌이를 해볼까 하던 시절이 있었다.
말하자면 전업이다.
그리하여 포트폴리오가 될만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포트폴리오가 조금 쌓이자 자신감을 얻은 나는 친한 선배에게 전업에
대한 고민을 조심스레 털어 놓았다.
선배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말했다.
“야~ 그림으로 날고 기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아...예... 그... 그렇죠..”
나는 기가 꺾여 대꾸 한마디 못하고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려야 했다.
삽화계는 어마무시한 고수들이 득시글거리는 무림의 세계!
나같은 촌뜨기 무사가 도전장을 낸다는 것은 말이 안되었다.
그렇다고 포기하진 않았다.
그간 포트폴리오로 그린 그림을 플로피디스크에 담아 출판사들을 찾아다녔다.
하루에 두 곳 많으면 세 곳이었다.
열흘 정도를 그렇게 돌아다녔다.
놀랍게도 출판사 직원 누구도 나의 방문을 거절하지 않았고 기꺼이
차를 대접했다.
일을 주겠다는 곳도 두어 곳이나 됐다.
하지만 끝내 연락은 오지 않았다.
역시 선배 말대로였다.
삽화를 그려 밥벌이를 하겠다는 내가 어리석었다.
그렇게 낙담하고 있던 차에 거짓말처럼 출판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국민서관이었다.
위인전집을 내고 있는데 분위기가 맞을 것 같다며 허준을 그려보라고 했다.
권당 화료는 250만원 이라면서.
뛸듯이 기뻤으나 한편으론 겁이 났다.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특히 칼라가 문제였다.
입시미술을 해본 적도 없고 수채화라곤 사진을 보며 그린 것이 전부다.
그래도 일단 부딪혀 보자.
마치 전쟁을 하듯 한 장 한 장 그려 나가던 나는 한달 하고도
보름 뒤 완성된 그림을 출판사에 제출했다.
내 생애 최초의 칼라로 된 책 삽화였다.
일은 무사히 끝냈으나 먹고 살 일이 막막했다.
그렇다고 출판사들을 더 찾아다닐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 때 거짓말처럼 국민서관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석주명을 그리던 사람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펑크를 냈다.
그러니 내가 대신 맡아 그려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삽화가에게 감사했다.
그로 인해 한 번 기회가 더 왔으니 말이다.
나는 최선을 다해 완성한 그림을 출판사에 제출했다.
하지만 운빨은 거기까지 였다.
출판사는 다음 작업을 내게 의뢰하지 않았고 나는 민망한 표정으로
출판사에서 드럼 스캔이 끝난 원화를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삽화가로 전업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만화와도 영원히
결별했다.
창작을 떠나 일반인의 삶을 살기로 했으니 말이다.
그로부터 6년 뒤
나는 연어가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듯 만화의 세계로 돌아왔다.
삽화는 나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가뭄에 콩나듯 삽화를 그릴 일이 생겼다.
청년사에서 동화책 삽화를 두 권 그렸고 국학진흥원 사이트에도 그렸다.
가장 최근에 그린 삽화는 재작년 경북정체성 포럼에 그렸던 삽화다.
새마을 운동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한 글엔 삽화를 그릴 수 없다 했더니
나의 의견을 존중해 그리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고마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다른 컷들에 클레임이 걸려 몇 번을 수정해야 했다.
이후론 누구도 삽화 의뢰를 해오지 않아 고맙게도(?) 만화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일주일 전 월간 “작은책” 편집장님으로부터 표지를 그려달란 전화가
걸려올 때까지.
(아래 그림은 경북 정체성 포럼에 그렸던 책삽화입니다.
태극기가 잘못돼 있다는 걸 알지만 귀찮아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
2017.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