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존 惠存
가끔씩 저자들에게 책을 받는다.
그 때마다 사인을 요청하는데 어떤 이들은 혜존 惠存이란 말을 쓴다.
'모년 모월 모일 정용연 惠存' 이런 식이다.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냥 좋은 말이겠지 했다.
오늘 문득 혜존이란 말이 궁금해 검색을 해보았다.
다음 사전에서 알려준다.
자신의 저서나 작품을 상대에게 줄 때 ‘받아 간직해 주십시오’ 하는 뜻으로
쓰는 말로서 일본어에서 온 한자말이라고.
그러면서 ‘○○님께 삼가 드립니다’ 등의 우리말로 바꿔 쓰는 것이 좋을 듯싶다고 말한다.
우리는 수많은 일본식 한자말을 쓰고 있다.
쓰고싶지 않아도 안쓸 수가 없다.
국민, 민주주의, 문화, 정치, 경제, 철학, 문학, 비행기, 자동차, 공항...
대채할 말을 찾기도 또 만들기도 힘들다.
말이란 시대적 환경에 따라 만들어지고 사라지기도 한다.
과거 불편한 역사가 있었다고 해도 쓰는게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몽골 간섭기 전해진 벼슬아치 구실아치 장사치란 말을 공기처럼 쓰고 있듯 말이다.
그렇다고 굳이 알기 힘든 말을 찾아내 쓸 필요는 없다.
아마도 내게 책을 주신 저자분들도 혜존이 일본식 한자말이란 사실을 몰랐나보다.
.
* 이렇게 쓴 내글을 보고 페친이신 이문영 선생이 혜존에 대한 글을 쓰셨다.
덕분에 국어사전이 모든 걸 말해주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아래는 이문영 선생의 글.
惠存.
혜존이라고 읽는다. 저자가 책을 선물할 때 쓰는 문구 중 하나다.
사실 요즘은 저 문구를 잘 못 봤다. 일단 한자 자체를 잘 안 쓰니까.
"은혜 혜"자에 "존재할 존"자니까 그냥 그대로 풀면 "가지고 있음(존재)을
감사하게 하라"는 정도가 될 것이다.
그렇게 보면 좀 건방져 보이는데, 이 말의 원 출전은 절강성 출신으로 당나라 초기의
뛰어난 4명의 시인 중 하나로 꼽히는 낙빈왕(駱賓王, 640~684)의 시다.
"박창의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與博昌父老書)"라는 시에 나오는,
寧復惠存舊好 追思昔游
(좋았던 옛 일을 어찌 또 잘 보존하여 그때 놀던 일을 돌이켜 생각하리오)
라는 구절에서 나왔다고 한다.
낙빈왕은 왕이 아니라 그냥 이름인데, 측천무후와 대립하는 통에 불운한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
아무튼 여기서 유래해서 잘 보관해 주시면 감사하겠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윗사람에게는 쓰지 않는 용어고, 동료와 아랫사람에게 쓰는 용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윗사람에게는 雅正(아정)이라고 쓰는데 우리식으로는
"많은 질정을 바랍니다"와 같은 말이다.)
언제부턴가 혜존이라는 말이 일본어라는 이야기가 돌면서
안 써야 지식인인 것처럼 말하고 한다.
일제의 식민지 경험은 터무니 없는 일에도 갖다 붙이기만 하면 통하는 마법과 같다.
방사형 무늬만 보면 욱일승천기라고 갖다 붙이는 일도 이러하다. 덕분에 우리는 방사형
무늬를 거의 잘 쓰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스스로를 옭매이는 이런 일이 대체 왜 자꾸 생길까.
작금에 벌어진 "메갈손" 논쟁도 그렇다.
대기업 넥슨이 블랙컨슈머에게 굴복해서 하청업체를 압박하는 이런 터무니없는
일은 대체 왜 일어나는 것일까?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되어 날아오른다고 한다.
학자는 사건이 벌어진 후에 그것을 분석할 수 있다는 의미로 통용된다.
이제는 이런 일이 게임업계에서만 통하는 이유를 분석할 때가 됐다고 본다.
아니, 있는데 내가 모르는 것일 수도 있긴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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