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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아버지

by 만선생~ 2024. 1. 17.

내가 집을 비운 사이 아버지가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 오시면
아버지는 메모를 꼭 한 장씩 남겨두셨다.
'빨래는 세탁기에 돌려 베란다에 널었고 국은 무우와 함께 끓여놨으니
뎁혀서 먹어라.' 등등 모두 생활에 관한 것이었다.
아버지의 메모는 철저히 정보전달용으로 어떠한 문학적 수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곳곳에 틀린 맞춤법으로 인해 교육수준이 높지 않음을 드러내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얼마 전 자신의 고독한 심경을 담은 한시 한 편과
한글시 두 편을 남겼다.
나는 아버지가 시를 썼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더 놀란 것은 시의 수준이었다.
정보전달용으로 쓰던 메모 수준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 시인이 되었던 아버지.
아버지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시를 쓴 게 아니었다.
만약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책갈피에 끼워져 있는 종이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나는 아버지가 시를 썼었다는 사실을 영원히 알지 못했을 것이다.
식구들을 건사하지 못하는 아버지가 싫었다.
날이면 날마다 술주정을 하는 아버지가 빨리 죽어 없어졌으면
좋겠단 생각도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그런 아버지를 나는 만화로 그렸다.
세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고 상을 받기까지 했다.
이제 아버지는 내게 더이상 술주정뱅이가 아닌 내 만화의 주인공이이다.
이제 나는 더하여 아버지를 시인으로 기억하려 한다.
어쩌면 아버지는 시적 감성을 타고났을지도 모른다.
다만 발현될 기회가 없었을 뿐...

201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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