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려 내쫓기는 ‘광화문’은 조선, 바로 ‘나’ (논객 소오 설의식)
소오 설의식
헐려 내쫓기는 ‘광화문’은
조선, 바로 ‘나’
서울은 500년 조선의 왕도이며, 경복궁은 조선의 정궁正宮, 광화문은 그 경복궁의 정문이다. 1926년 일본은 오랫동안 별러온 광화문 철거를 감행한다.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 후 경복궁이 빈 궁궐로 남게 되자, 일제는 ‘조선의 심장’ 경복궁을 임의대로 처리할 궁리를 시작한다. 1915년 경복궁에서 박람회인 이른바 ‘조선물산공진회’를 연다는 핑계로 경복궁의 전각들을 헐어내고, 공진회가 끝나자 바로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의 시야를 가린다는 이유로 광화문을 헐어내려 하였다.
그러나 광화문 철거 계획은 곧 반대 여론에 부딪혔다. 일본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91)도 1922년 9월호 <개조改造>에 ‘사라지려하는 한 조선 건축을 위해서’라는 글을 기고하며 자국의 비문화적 행위를 비난하는 등 이를 반대하는 여론이 나라 안팎으로 크게 일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뜻을 굽힐 일제가 아니었다. 일제는 차선책으로 광화문을 뜯어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한다. 하여 광화문은 1926년 7월 22일 해체되기 시작하여 1927년 9월 15일 경복궁 동쪽 건춘문 근처(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입구 자리)로 옮겨진다.
이러한 시국에 1926년 8월 11일자 <동아일보>에 설의식이 발표한 한 ‘헐려 짓는 광화문’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참으로 당당한 민족의 혼이요, 문화유산인 광화문이 속수무책으로 헐려지는 처지에, 일제에 강점당하여 손발이 묶이고 피가 말리는 고통을 겪고 있던 당시 조선인의 참담함을 고스란히 포갠, 참으로 ‘애국적 명문’이 아닐 수 없었다.
헐린다, 헐린다 하던 광화문은 마침내 헐리기 시작한다. 총독부 청사 까닭으로 헐리고, 총독부 정책 덕택으로 다시 짓게 된다. 원래 광화문은 물건이다. 울 줄도 알고 웃을 줄도 알며 노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아는 사람이 아니다. 밟히고 꾸물거리고 죽이면 소리치는 생물이 아니라 돌과 나무로 만들어진 건물이다.
의식 없는 물건이요, 말 못하는 건물이라 헐고, 부수고, 끌고, 옮기고 하되, 반항도, 회피도, 기뻐도, 설어도 아니한다. 다만 조선의 하늘과 조선의 땅을 같이한 조선 백성들이 그를 위하여 아까워하고 못 잊어 할 뿐이다. 오랜 동안 풍우를 같이 겪은 조선의 자손들이 그를 위하여 울어도 보고 설어도 할 뿐이다.
석공의 망치가 네 가슴을 두드릴 때도 너는 알음이 없으리라마는 뚝닥닥 하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가슴 아파하며 역군役軍의 지렛대가 네 허리를 들출 때에 너는 괴로움이 없으리라마는 우지끈 하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허리 결려 할 것을 네가 과연 아느냐, 모르느냐.
팔도의 석재와 목재와 인재의 정수精粹를 뽑아 지은 광화문아! 돌덩이 한 개 옮기기에 억만 방울의 피가 흐르고 개왓장 한 개 덮기에 억만 줄기의 눈물이 흘렀던 광화문아! 청태靑苔 끼인 돌틈에 이 흔적이 남아 있고 풍우 맞은 기둥에 그 자취가 어렸다 하면, 너는 옛 모양 그대로 있어야 네 생명이 있으며, 그 신세 그대로 무너져야 네 일생을 마친 것이다.
풍우 기백년 동안에 충신도 드나들고 역적도 드나들며, 수구당도 드나들고 개화당도 드나들던 광화문아! 평화의 사자使者도 지나고, 살벌의 총검도 지나며, 일로日露의 사절과 청국淸國의 국빈도 지나던 광화문아! 그들을 맞고 그들을 보냄이 너의 타고난 천직이며, 그 길을 인도하고 그 길을 가리킴이 너의 타고난 천명이었다 하면, 너는 그 자리 그곳을 떠나지 말아야 네 생명이 있으며, 그 방향 그 터전을 옮기지 말아야 네 일생을 마친 것이다.
너의 천명과 너의 천직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였거니와, 너의 생명과 너의 일생은 헐리는 그 순간에, 옮기는 그 찰나에 마지막으로 없어지고 말 것이다. 너의 마지막 운명을 우리는 알되 너는 모르니, 모르는 너는 모르고 지내려니와 아는 우리는 어떠하게 지내랴.
총독부에서 헐기는 헐되, 총독부에서 다시 지어 놓는다 한다. 그러나 다시 짓는 그 사람은 상투 짠 옛날 그 사람이 아니며 다시 짓는 그 솜씨는 웅건한 옛날의 그 솜씨가 아니다. 하물며 이시이인(伊時伊人;그때 그 사람)의 감정과 기분과 이상이야 말하여 무엇하랴? 다시 옮기는 그곳은 북악을 등진 옛날의 그곳이 아니며, 그 방향은 경복궁을 정면으로 한 옛날의 그 방향이 아니다.
서로 보지도 못한 지가 벌써 수년이나 된 경복궁 옛 대궐에는 장림(長霖;오래 계속되는 장마)에 남은 궂은 비가 오락가락한다. 광화문 지붕에서 뚝딱하는 망치 소리는 장안을 거쳐 북악에 부딪친다. 남산에도 부딪친다. 그리고 애닯아 하는 백의인白衣人의 가슴에도 부딪친다.……
<설의식의 ‘헐려 짓는 광화문’, 동아일보 1926년 8월 11일 기사>
일제 강점기 당시 신문사라는 공간은 언론 기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민족 운동 진영의 젊은 청년 지식인들이 모여드는 중심 기관이기도 했다. 조선인의 정치나 현실 참여에 족쇄가 채워졌던 당시, 신문사는 민족 운동 진영의 인사가 모여드는 합법적 공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의식 있는 조선의 젊은이가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직장이기도 했다. 광복 후 정치계는 물론이요, 학계와 관계, 문화계를 주도했던 인사들이 신문사 출신인 경우가 많은 것은 이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당시의 신문기자는 흔히 당대의 내로라하는 문장가이자 역사학자였을 정도로 재능이 깊었다. ‘빈처’의 현진건, ‘표본실의 청개구리’의 염상섭, ‘불놀이’의 주요한, ‘상록수’의 심훈, ‘무정’의 이광수, ‘임꺽정’을 썼던 홍명희, 위창 오세창, 위당 정인보 등등이 대표적인 면면이다.
소오 설의식(小梧 薛義植 1901-1954)도 이 명단에서 빠질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의 동료이자 문인이었던 주요한(朱耀翰 1900-1979)은 “소오는 본질적으로 언론인이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현대적 감각의 문장가였으며 수필가였고 직업적인 작가, 정치적인 문제들을 격조 있게 논평한 평론가였다(‘인물론-소오 설의식’(1975년 8월))”고 회고한 바 있다.
주요한의 같은 글에 의하면 설의식은 “생활과 직업을 분별하지 않고 직업적으로 몰입하는 부지런한 성격”이었으며, “생활에 충실하고 자기 글을 아끼”는 사람이었다. 설의식은 각종 평문, 시론, 수필 등을 모아 <화동시대>, <해방이전>, <해방이후>, <금단의 자유>, <통일조국>, <치욕의 표정>, <민족의 태양>, <난중일기>, <소오문장선> 등 10여 권의 책으로 꼼꼼히 묶어내기도 했다.
집념과 문재文才, 부지런함으로 일군 ‘언론’의 삶
그가 기자로서 첫발을 내디딘 것은 동아일보에 입사한 1922년. 이후 사회부장과 도쿄 특파원, 편집국장을 차례로 맡으면서 논지가 선명하고 재치있는 논설과 시평으로 동아일보 안팎에 이름을 높였다. 특히 그는 단문短文을 잘 쓰기로 이름이 나 있었는데, 초창기에는 ‘보는 대로 듣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라는 단평을 연재하여 필명을 얻었고, 그가 도맡아 집필한 것으로 알려진 ‘횡설수설’이라는 단평 칼럼은 동아일보의 상징이자 고갱이 같은 고정란으로 <조선일보>의 ‘팔면봉’, <중외일보>의 ‘반사경’과 함께 견주어지면서 주목을 받았다. 을축년대홍수로 유명했던 1925년, 조판을 해놓고도 갑작스러운 정전으로 신문을 찍을 수 없게 되자 윤전기를 붙들고 통곡하였다는 일화는, 그의 언론에 대한 집념과 근성, 열정을 보여주는 한 예로 읽히기도 한다.
그런 그가 동아일보를 물러나게 된 것은 잘 알려진대로 1936년 일장기 말소 보도 사건 때문이다. 당시 설의식은 동아일보의 편집국장. ‘의도적 항일’과 다름없던 이 사건의 여파는 매우 컸다. 자신의 전부였던 언론 생활에 제동이 걸리자, 그는 언론, 문필계에 손을 끊고, 금광 등 사업에 손을 대기도 하였다(<황금광시대>(전봉관 지음, 살림, 2005)). 언론에 복귀한 것은 1945년 광복 직후 동아일보 복간과 함께이다. 이후 1947년 퇴직할 때까지 동아일보의 주필과 부사장을 지냈으며, 오랫동안 몸담았던 동아일보를 떠나온 뒤에도 ‘신문적 잡지 잡지적 신문’을 표방한 순간지旬刊紙 <새한민보>를 창간하였다.
설의식은 함남 단천에서 설태희의 5남매 중 2남으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 설태희薛泰熙는 구한말 헤이그에 밀사로 파견된 이준(李儁 1859-1907) 열사 등과 함께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조직하는 등 애국계몽운동과 교육구국운동의 발흥에 나섰던 구한말 선각자이다. 1916년에 원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한 설의식은 1917년 서울중앙학교에 입학했다가 3·1운동과 관련하여 퇴학 당하였으며, 이후 니혼日本대학을 졸업하였다. 1922년 4월에는 전남 장성의 약수학교 교사로 재직한 적도 있었다.
그의 특기인 ‘언론’의 경륜을 퇴직 후에도 활발히 펼치지는 못하였으나 6·25전쟁으로 부산에서 피란살이를 하였던 말년에는 ‘충무광忠武光’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충무공 연구에 공을 들였다고 한다. 수복 후에는 환도하여 서울 명륜동에서 살았는데, 약 7, 8개월 심장병으로 병석에 누웠다가 죽음을 맞이하였고, 서울 중랑구 망우리공원에 안장되었다. “깨끗이 정돈된 방 한 구석에는 피난란살이에 시달린 트렁크며 이 충무공에 대한 저서가 엄숙히 놓여 있다. 사십년 가까운 장구한 세월을 오로지 신문인으로 바친 노기자의 유산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트렁크 몇 개와 서재에 가득 쌓인 책 그것이 전부였다(‘국민보’(1956년 2월 15일)).” 언론인 오소백(吳蘇白, 1921-2008)은 설의식이 죽음을 맞이하기 두어 달 전의 만남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시대의 일상이 역사가 된다
평생 언론에 투신한 소오 설의식은 철저한 직업의식과 풍부한 문재文才와 부지런함으로써, 뚜렷한 족적을 갖는 언론인이 되었다. 그에게 주어진 일상, 그가 선택한 ‘언론’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냈기에, 그의 삶과 일상은 이제 고스란히 역사가 되었고, 그의 문장 ‘헐려 짓는 광화문’은 ‘이 땅의 역사와 문화유산이 바로 나 자신’임을 크게 일깨워준 하나의 ‘시대정신’이 되었다. 일상의 치열한 삶을 시대정신으로 승화시킨 참 언론인, 그러하기에 노산 이은상은 죽음으로 꺾인 설의식의 붓을 그토록 안타까워하였던 터이다. 일제 강점기 ‘헐려 지은’ 광화문은 6·25전쟁으로 파손되어 1968년 박정희 정권 때 시멘트로 복원된 바 있다. 이때 철저하지 못했던 고증과 시원찮았던 시대정신 때문에 광화문은 여러 오류를 갖게 되었다. 이제 다시 광화문은 우리 손에 맡겨졌다. 경복궁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새롭게 선보일 광화문을 못내 기다리며, 노산 이은상이 소오 설의식에게 바친 조시弔詩 ‘노기자의 주검’ 나머지 한 부분을 낮게 읊어본다. “…그리고 남는 이름은/ 뒷사람이 가져감세…”. 역사는 쉬는 법이 없다.
글·박종분 자유기고가
사진·동아일보, 눌와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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