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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역사

만주 금주성

by 만선생~ 2024. 9. 13.

 

 

 

할머니는 1945년 9월 만주 금주성에서 돌아가셨다.
퇴각하는 일본군과 이를 저지하는 중국군 사이에 벌어진 총격전으로
지병이 도지면서 숨을 거두었다.
아버지가 우리 형제들에게 귀에 못박히도록 하신 이야기다.
나는 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며 거대한 중국식 성곽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총격전을 상상했다.
그리고 성문엔 금주성이라 써있는 편액이 걸려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의 상상은 잘못된 것이었다.
금주성의 성은 성곽이 아닌 행정구역을 뜻하는 성이었다.
괴뢰국인 만주국 역시 중국과 마찬가지로 행정구역을 성으로 나누었던 것이다.
물론 만주국의 크기가 중국 본토에 비해 작아
한개 성의 크기도 작았다.
아버지가 살던 금주성 역시 지금 중국의 절강성 흑룡강성 호남성 사천성
등에 비해 작지만 한국의 행정구역인 도보다는 훨씬 컸다.
아버지가 살던 곳은 청나라 수도였던 봉천에서 차로 한시간 거리에 있던
태평방이었다고 한다.
일제는 이주한 조선인들에게 일주일에 한번 식량을 배급했는데 아버지는
식량을 배급받으러 요나라 수도였던 조양까지 갔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기억하는 봉천과 조양은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서울시내의 백배는 될거라고 했다.
나는 아버지의 기억이 왜곡됐을 거라 믿었다.
넓긴하겠지만 백배가 될 수 없는게 두 도시의
인구수는 서울보다 훨씬 적었다.
어린시절 그토록 넓어보이던 학교 운동장이 어른이 되어 보면 좁아보이듯
다섯에 보았던 두 도시에 대한 기억은 과장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넓긴 넓으리라.
대제국인 요나라와 청의 수도였으니 말이다.
중국과 국교정상화가 됐지만 아버지는 생전에 할머니가 묻힌 곳을 가보지
못했다.
설사 갔더라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열다섯. 아버지가 바라보았던 만주들판은 어땠을까?
북경에 갔다오니 더 궁금해진다.
돈이 벌리면 만주여행이나 한 번 다녀와야겠다.

2017.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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