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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여행 3 이성당 빵집 이성당 빵집 별다른 정보없이 군산 근대 문화거리를 걷다 빵집을 발견했는데 이성당이다. 언듯 듣긴 했으나 눈으로 보긴 처음이었다. 건물은 낡아보였으나 문은 끊임없이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 하였다. 한마디로 문전성시다. 비결이 뭘까 싶어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사람들이 많았다. 계산대엔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한산한 여느 빵집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 정도 손님이면 재벌은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지 않을까 싶었다. 평일에도 이런데 주말엔 어떨까 싶었다. 마침 아침을 먹지 않아 배가 출출하였다. 단팥빵 하나에 2,500원이어서 두개를 사서 먹었는데 맛있었다. 더 먹고 싶었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나무위키를 검색하니 이성당 역사가 나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이었다. 예상대로 빵집을 연건 일.. 2024. 3. 25.
군산 여행 2 채원병 가옥 채원병 가옥 여행의 즐거움은 의외성에 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뜻하지 않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뜻하지 않은 곳을 가게되는. 인생도 예정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듯 여행 또한 그렇다. 관아에 관심이 많아 임피 관아를 둘러보고 있을 때다. 관아의 흔적이라고는 이방청과 연지밖에 남아있지 않아 허망해 하고 있는데 낯선이가 다가와 채원병 가옥을 가보라 한다. 인근 함라 삼부자집은 가봐서 알고 있다. 하지만 채원병 가옥은 금시초문이다. 그 이가 말하길 예전엔 엄청 큰 집이었는데 동(혹은 한국 전쟁)학 때 많이 불살라 없어지고 몇 채만 남았단다. (중간 생략) 채원병 가옥은 임피 관아에서 멀지 않았다. 한데 와보니 담이 없다. 들어서자마자 사랑채다.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다만 남아 있는 건물들을 미루.. 2024. 3. 25.
군산 여행 1 임피 노성당老聖堂 임피 노성당老聖堂 지방에 가면 관아를 찾아보곤 한다. 지금은 군산에 속해있는 임피를 찾은 건 '노성당老聖堂'이란 관아 건물 때문이다. 객사와 동헌같은 중심 건물은 온데간데 없고 부속 건물인 이방청만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헌데 문이 잠겨 들어갈 수가 없다. 노성당 맞은 편에 살고 있는 사람이 말하길 관리하는 직원이 10시 쯤 들린뒤 돌아가곤 한단다. 전화를 하려 해도 전화 번호가 없었다. 여산 동헌에 갔을 때는 전화번호가 적혀 있어 면사무소 직원이 나와 문을 열어 주었는데. 담너머 노성당을 바라보며 궁금증이 생겼다. 이 건물을 이방 혼자 썼던 것일까? 아니면 이호예형공병방이 함께 썼던 것일까? 이방 혼자 썼다면 나머지 다섯개 건물이 더 있었다는 것이고 육방관속 모두 함께 썼다면 건물이 너무 비좁다... 2024. 3. 25.
김제 여행 4 금구향교 2 금구향교 2 항교의 총 책임자를 전교라 한다. 전임 전교인 배현식 어르신은 47년생으로 올해 나이 일흔 일곱이다. 어르신께 내 고향이 와룡이라고 하니 그 동네를 훤히 알고 계셨다. 사시는 곳이 황산면 상리인데 용지면 와룡리와는 그리 멀지가 않다. 용지 와룡은 하랭이라 불린다. 하랭이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이는 극진가라데 창시자인 최배달이다. 본명은 영의로 최승현의 네째 아들인데 형제들 또한 기골이 장대하다. 최영의의 바로 윗형인 최영범씨는 우리 아버지와도 친분이 깊었다. 배현진 어르신은 최씨 문중을 훤히 다 꿰고 계셨다. 최영의 부친인 최승현옹 즉 최면장의 키가 크고 뼈대가 굵었다는 것을 말하였다. 무면허 의사였던 아버지는 최면장 집으로 찾아가 링겔주사를 놔드리곤 하였다. 어머니 말로는 우리집 가까이 등.. 2024. 3. 25.
김제 여행 3 금구 향교 1 금구 향교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만경현과 금구현은 김제로 강제 편입되었다. 원님이 다스리는 고을에서 일개 면이 된 것이다. 이후 두 고을은 농촌 인구의 감소와 더불어 퇴락의 길을 걷는다. 김제 원평은 본디 금구현이었다. 김제와는 생활권이 완전 다르다. 그 것을 강제로 하나로 합쳐놓은 것이다. 김제 원평 집강소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어 찾은 곳은 금구향교다. 금구관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향교만 남았다. 흉포하기 이를데 없는 일제도 유림의 눈치를 보느라 향교를 없애지 못했다. 그만큼 지방사회에 강력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향교엔 늙은이들만 남아 명맥을 겨우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시간이 좀 더 흐르면 문화재로서만 남을 판이다. 금구 향교 역시 여느 향교와 마찬가지로 퇴.. 2024. 3. 25.
김제 여행 2 김제 관아 김제 관아 내 고향 김제에 가면 김제 관아를 둘러보곤 한다. 조선시대 관아는 지방의 치소다. 그 수만해도 300개가 넘었다. 김제는 종5품인 군수가 다스리는 고을이다. 객사 동헌 내아 작청 향청 교방청 사령청 옥 등 십여 개의 건물이 있었다. 관아에 살던 이들만 해도 고을 수령을 비롯해 100명이 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남아있는 것은 동헌과 내아 그리고 파금각이란 정자 뿐이다. 그럼에도 김제 관아는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은 곳이 많다. 그만큼 관아는 근대화를 거치면서 철저히 파괴되었다. 조선시대 김제 군수를 역임한 몇 이었을까? 확인을 해보지 않아 모르겠다. 참고로 제주 목사의 수는 250명 쯤 된다. 역대 김제 군수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는 정담인 것 같다. 김제 군수 정.. 2024. 3. 25.
김제 여행 1 금산교회 금산 교회 2005년 아버지 살아계셨을 때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찾았던 금산교회.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사 가는 길에 있다. 오늘 김제 원평 집강소에 오며 들렀는데 마침 문이 열려 있었다. 무신론자인 내가 교회에 올 이유는 전혀 없지만 건물이 한옥이라면 다르다. 들러야 할 이유가 된다. 강화 성공회 성당도 같은 이유였다. 금산 교회가 세워진 건 1905년. ㄱ자 형태의 집으로 남성 신도와 여성 신도의 공간을 나누었다. 남녀가 유별한 당시 사회 분위기로선 당연한 조치였다. 지금도 커텐이 쳐 공간을 나누고 있었다. 한옥에 들면 빠지지않고 바라보는 것이 상량문이다. 상량문을 보고 건물의 연대와 용도를 알 수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금산교회 상량문은 연도 대신 성경 구절이 적혀있다. 남성들 공간은 한문 여성.. 2024. 3. 25.
나주에서 5 태조 왕건 나주는 왕건의 땅이다. 나주를 손에 넣으므로서 고려 건국의 기틀을 다졌다. 그에 반해 견훤으로선 통한의 땅이다. 나주를 잃으므로서 주도권을 잃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먼저 나주를 지배하고 있던 견훤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없고 오로지 왕건에 대해서만 말한다. 왕건은 나주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왕건을 대체할 나주 출신 인물이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고려의 기틀을 다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나주! 고려왕실에게 나주는 친정과도 같은 곳이다. 그리하여 1010년 거란 침략시 고려 현종은 개경을 떠나 나주로 왔다. 그리고 개경이 수복되었단 소식을 듣고 나주를 떠나다 사고를 당한다. 왕을 태우고 가던 수레를 네마리 말이 이끌었는데 그만 다리 아래로 빠지고 만 것이다. 이 때 백성들이 모여 .. 2024. 3. 24.
나주에서 4 남평 오일장 남평 읍내에 오일장이 열렸다.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 말소리가 정겹다. 전라도에 와있음을 실감한다. 안타깝게도 장터엔 늙은이들만 넘쳐난다. 세월이 조금 더 흐르면 이같은 오일장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장에 나와있는 물건을 하나라도 팔아주고 싶지만 집이 멀다. 대신 일행 분께서 이런 저런 물건을 산다. 남평이 고향인 박향미 작가는 무려 48년만에 이웃에 살던 동심언니를 만났다. 수퍼를 운영하며 붕어빵 장사를 하고 계셨는데 붕어빵을 사자 자꾸만 물건을 더 얹어주셨다. 2024. 3.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