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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삽화를 그리던 중에

by 만선생~ 2023.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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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엄마 계타는 날이냐?"
 
고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은 반친구에게 농담으로 건넨 말이었다.
 
계타는 날은 기쁘다.
오랫동안 부었던 돈을 타니 안 좋을 수가 없다.
가전제품도 사고 자녀들 등록금도 내고 전세 자금도 마련하고.
계타는 날은 삶의 도약을 이루는 날이다.
위기에 빠져 있었다면 계를 타며 위기에서 빠져 나오기도 한다.
 
지금은 계가 사라진 듯 하지만 몇 십년 전만 해도 너도나도 계를 맺었다.
계를 맺어 자신의 삶을 보호했다.
말하자면 사회 안전망이었다.
국가가 삶을 보장해주지 못하니 개인들끼리 힘을 모아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조선은 계의 나라였다.
위로는 양반들부터 아래로는 종들까지 계를 맺었다.
종들이 양반을 죽이자는 살주계와 검계도 있었다.
 
신분제사회의 맨 밑바닥에 있는 종들도 죽음이 슬프기는 마찬가지다.
계원의 아내가 죽자 장례를 치른다.
장례가 끝나니 약간의 무명자락이 남았다.
당시 무명은 쌀과 함께 화폐로서 기능을 하였다.
종들은 무명자락을 어디에 쓸까 하다 술로 맞바꾸어 먹었다.
헌데 어딜가나 술버릇 고약한 놈이 꼭 하나 있다.
줏동이라 불리는 종이 난데없이 웃통을 벗어던지고 다른 종에게 덤벼든 것이다.
시비를 걸어오는데 가만히 앉아있을 이 없다.
당연 일어나 맞서 싸우니 싸우는 사람과 말리는 사람들로 내내 소란스럽다.
소식을 들은 줏동의 아내는 급히 달려오고..
이윽고 싸움은 고소고발로 치닫는다.
 
예안(지금의 안동) 선비 김영은 아랫 것들의 싸우는 모습에 혀를 찼다.
이어 그 모습을 일기에 썼다.
조선 시대 향반들의 삶을 잘 보여주는 "계암일록"은 
예안 선비 김영이 수십년 간 써내려간 기록이다.
그에 반해 종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지 못했다.
글을 모르고 설사 글을 알고 있어도 그 비싼 종이를 구할 방법이 없었다.
문집으로 발행하여 후세에 전할 방법은 더더욱 없었다.
오늘날 조선시대 하층민의 삶을 알기 힘든 이유다.
오로지 양반의 입을 빌어 전할 뿐이었다.
 
(국학진흥원 삽화를 그리며 썼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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