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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국내

김제 원평 3

by 만선생~ 2023. 12. 23.

1894년 11월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동학농민군이 후퇴하여 12월 금구
원평까지 후퇴하였다.
동학농민군은 구미란이란 낮은산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으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 총탄에 맞아 쓰러진다.
대지에 스며드는 붉은피.
하늘은 까마귀떼로 뒤덮였다.
원평 사람들은 너나없이 구미란으로 달려가 시신들을 묻었다.
그렇게 구미란은 동학농민군의 원혼 가득한 산이 되었다.
나라에선 동학도들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라를 뒤엎으려는 세력은 반드시 죽여야했다.
동학도들은 산으로 들로 깊이깊이 숨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뒤에도 동학도들은 세상 밖으로 나서지 못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서도 농민반란이라 기술하였다.
민주정권이 들어서서야 동학농민군 또는 동학 혁명군이란 이름을 얻었다.
김제 원평에 동학을 신실하게 믿는 부부가 있었다.
이들 부부에게서 난 아들은 평생 동학을 연구하였다.
향토사학자로 뿌리깊은나무 전라도 편에 실리기도 한 최순식 선생이다.
그 따님이신 최고원 선생은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아 김제동학기념사업회를 꾸리고 있다.
그 장소가 바로 김제 원평집강소다.
조선시대 가장 천대받던 백정 출신 동록개가 동학도들을 위해 내놓은 집이다.
2022년 12월 21일 원평집강소에서 동학농민군들의 넋을 위로하는 추모회가 있었다.
동학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또 김제가 고향인 사람으로서 아무리 바쁜일이
있어도 참여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리하여 아침 일찍 의정부를 출발하여 추모회가 시작하는 1시 정각
원평집강소에 도착하였다.
최고원 선생의 사회로 동학농민군을 위로하는 여러 공연이 진행되었다.
공연이 모두 끝나고 나서는 동학농민군 영전에 절을 한 뒤 술을 따라 올렸다.
감사하게도 최고원 선생이 이 모습을 찍어주셨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와 통화를 하면서 원평을 가보았냐고 물었다.
원평과는 별 인연이 없는 듯 하지만 혹시나 해 물어본 것이었다.
어머니는 뜻밖의 대답을 하였다.
어릴 때 외할머니 손을 잡고 원평사는 이모님댁에 자주 갔었다는 것이다.
외할머니의 막내동생이라 하였다.
이모부가 학자로 다른 일은 할 줄 모르고 오로지 글만 읽었다고 한다.
이후 소식을 아냐고 물으니 세월이 오래되어 소식을 알 수없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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