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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역사

택호

by 만선생~ 2024. 9. 11.

택호
 
강경댁 원평댁 이서댁 부용댁...
우리 어릴 때만 해도 택호를 많이 썼다.
이름을 부르기가 좀 뭣하니 시집오기 전 살던 고장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우리 외할머니는 부안 연동이란 곳에서 시집을 오셔 연동댁이라 불렸다.
미을 사람 뿐 아니라 외할아버지도 그리 불렀다고 한다.
외할아버지가 남긴 유언은 '오바 속에 있는 50원을 연동댁에 주라'는 것이었다.
 
친할머니는 해방이되던 해 만주에서 돌아가셨다.
전해지는 택호가 없다.
오늘 같이 비가오는 날엔 아버지는 꼭 술을 드셨다.
한 잔 두잔 한 병 두병......
술에 거나하게 취한 아버지는 "아이고 어머니~ "
하며 우셨는데 가장으로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게 정말 불만이었다.
한국 전쟁이 끝난 뒤 결혼한 어머니는 시어머니 얼굴을 뵌 적이 없다.
결혼 이후 고생을 이루말할 수 없이 했음에도
시집살이만큼은 하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랄까?
친할어머니가 살아계셨음 며느리를 알뜰 살뜰 챙겨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친할머니 얘기가 나오면 '울김'이 양반이란 소릴 하셨다.
울김은 울산김씨의 줄임말로 친할머니가 하서 김인후의
직계손이란 의미다.
하서 김인후란 인물이 전라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어느정도인지 굳이 말하지 않겠다.
영남에 퇴계가 있다면 호남엔 하서가 있다.
 
지금까지 난 우리 어머니 택호를 들어보질 못했다.
큰형 이름을 따 경연 엄마라 했을 것도 같은데 그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
아버지가 우리 어머니를 일컬을 때는 '느그엄마'였다.
소리나는대로 하면 '느검마'가 된다.
어머니가 우리들 앞에서 아버지를 일컬을 땐 그냥 '아버지' 였다.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에게 '의사양반'으로 불렸다.
한동안 무면허의사 노릇을 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이모들은 모두 살고 있는 동네 이름을 붙여 불렀다.
거여동 이모, 상일동 이모, 소라단 이모다.
사촌누나는 안양에 살아 안양누나가 된다.
이름을 알고 있지만 그리 부른다.
조카들 역시 살고 있는 도시 이름을 붙여 수원숙모, 오산숙모, 포천고모라 한다.
예외로 나를 부를 땐 도시 대신 만화 삼촌이라 부른다.
생각해보니 동네 어른들을 부를 땐 이름 뒤엔 양반을 붙였다.
영도양반, 찬석이양반 이런 식이다.
 
여기서 양반이란 직책이 없는 사람에 대한 높임말이다.
여자들 가운데 사임당이니 임윤지당이니 빙허각이니 하는 그럴 듯한 택호는 없었다.
지금은 여자가 시집을 가면 보통 아이 이름을 따 민지엄마 순안이엄마가 된다.
사회생활을 하면 그 때야 비로소 부모님이 지은 이름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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