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연락이 닿지않는 그가 아직도 만화가의 꿈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버렸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확실한 건 어디선가 그림을 그리고 있으리란 것이다.
돈을 받고 그리던 돈을 받지 않고 그리던 쉬지않고 종이나 모니터 위에
뭔가를 끄적거릴 테다.
그는 정말 그림을 잘 그렸고 멋진 만화를 그리고 싶어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가 만화 원고를 그리는 모습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의 그림은 만화 칸속에 들어가 있지 않았고 언제나 멋진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인물들이 연습장에 얹혀져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좋은 구슬이라도 꿰야 보배일텐데 저리 연습만 하다니...
안타까운 마음에 한마디 했다.
단 몇페이지라도 좋으니 원고를 완결시켜보라고.
그는 그렇게 짧은 걸 그려 어디에 쓰겠냐고 했다.
나는 또 말했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다.
몇페이지짜리 원고를 완결시킬 수 있어야 비로소 장편도 그릴 수 있지
않겠냐고.
하지만 그는 나의 말을 귓등에 흘려들었다.
그가 만화를 그리겠다고 나선지 이십여년.
그가 그린 원고는 총 11페이지다.
스타뉴스라는 길거리 잡지에 실은 6페이지짜리 원고와 한페이지 짜리 원고.
그리고 외국단편소설을 읽고 그린 4페이지 짜리 원고.
(그마저도 완성하지 못했다)
적어도 내가 본 원고는 이 것이 전부다.
그를 오랫동안 알아온 어느 선배는 그가 이십년 동안 그린 만화가 총 20
페이지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극단적 창작력의 부재...
무엇이 문제일까?
우선 눈높이가 너무 높았다.
그의 기준은 일본 만화들이다.
그 중에서도 그림이 좋다고 정평이 나있는 만화들이다.
아키라를 그린 오토모 카쓰히로 공각기동대의 감독 오시이 마모루...등등등
모두 밤하늘의 별과 같은 존재다.
별이 되고 싶어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그전에 작은 촛불부터 켜야 하지 않을까?
다음은 스토리 능력이 없다.
기가막힌 스토리를 쓰려 하지만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
단 한페이지도 눈앞에 꺼내놓지 못한다.
마치 방안에서 한바짝도 벗어나지 않으려하는 사람이 세계일주를
못해 안달하는 것과 같다.
자기 일상에서 아주 작은 이야기를 건져올릴 수도 있으려만 눈높이가 너무 높은
까닭에 작은 이야기 따윈 관심이 없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실행력 부재다.
한가지를 잡고 물고 늘어지는 힘이 없다.
그러하기에 외국단편소설도 중간에 포기했던 거고...
만화가로서의 그의 능력은 제로에 가깝다.
그렇다고 다른 생활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행인 것은 집안이 어느 정도 살아 경제적 도움을 받을 수 있고 타고난 그림실력으로
인해 게임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다는 거다.
그래서 늦게나마 결혼도 할 수 있었다.
언젠가 그를 우연히 홍대전철역에서 만났는데 근처 게임학원에서 원화를 가르친다고 했다.
일주일 두번 네시간씩 수업을 하고 이백만원정도 받는단다.
그렇다면 나머지 시간은 자기를 위해 투자를 하거나 다른일도 할 수 있어 좋겠다
싶었는데 눈치를 보니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내게 먼저 전화를 하는 법이 없다.
간혹 내가 한번씩 할 뿐이다.
그날 우연한 만남 이후 일년쯤 지나 전화를 했다.
전화를 안받았다.
또 일년 가까이 지나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전화를 받았다.
전화 번호가 완전히 바뀐 것이다.
이렇게 소식이 끊긴 적은 없었는데 무슨일이 있는 걸까?
뜻밖이었다.
아니 충격이었다.
그사이 그가 단행본을 낸 것이다.
그 것도 제법 두꺼운...
그의 창작력 부재를 비웃던 나의 코가 석자이상 들어간 것은 말할나위가 없다.
맹렬히 타오르는 시기심을 누르며 웃는 낯으로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다.
그는 활짝 웃었다.
웃음엔 자기 작업에 대한 자긍심이 뭍어 있었다.
꿈이 아니었으면 좋으련만...
그의 단행본 출판소식은 꿈이었다.
밤사이 내가 꾼...
허탈함과 더불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그의 출판소식이 진짜라면 책 한권을 내기 위한 나의 분투가 참으로 부질없어
보일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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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해야 할 시간에 이 무슨...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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