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벗과의 만남]1577년의 조보 인출사건
조선시대의 신문은 조보(朝報)였다. 조보는 기별(奇別)이라고도 했고, 저보(邸報) 또는 한경보(漢京報)라고도 불렸다. 글자 그대로 조정의 소식을 전하는 신문인 조보는 오늘날의 관보(官報)에 해당하는데, 조선시대의 유일한 신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는 임금의 동정부터 조정의 대소사를 비롯한 정치의 핵심 안건이 소상하게 실려 날마다 발행되었다.
이렇게 중요한 조보는 알아보기 힘든 난필(亂筆)로 필사하여 경향의 관아와 사대부들에게 전해졌다. ‘조보체’ 또는 ‘기별 글씨’라는 난필로 쓰여진 것은, 빠르게 필사한 데도 이유가 있지만 국가기밀을 외국인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은 이 조보를 간행하고 있었고, 조선에서도 인출(印出)하고자 하는 욕구가 팽배하였던 모양이다.
그로 인해 조보를 둘러싼 큰 사건이 1577년(선조 10년)에 발생하였다. 이 해 서울의 상인 30여명이 조보를 인출하여 각 관아에 팔아 생계를 꾸리겠다는 청원서를 의정부와 사헌부에 제출, 허가를 받았다. 그들은 활자를 새겨 조보를 인출, 경향의 각 관아와 사대부에 판매하였다. 필사의 어려움도 없었고, 보기에도 편리했으므로 누구에게나 환영받았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임금인 선조는 생각을 달리하였다. 인출을 시작한 지 여러 달 지난 11월 선조가 우연히 이를 보고 진노하면서 사건이 불거졌다. 조보를 임금의 허락도 없이 간행한 데에는 배후가 있다고 판단한 선조는 주동자를 색출하라고 30여명의 관계자를 의금부에 가두어 조사하게 하였다. 허가를 해준 사헌부와 사간원, 의정부 등에서는 인출한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한 일이므로 국가의 중대 죄인을 다루는 의금부에서 다루는 것이 가혹하다고 옹호했다. 선조는 더욱 화를 내어 “서책을 인출할 때는 모두 내 허락을 받은 다음 시행하되 만약 마음대로 인출할 시에는 통렬히 죄를 다스리겠다”며 서적 출판까지 임금의 재가를 받도록 명했다. 조보 인출용 활자를 몰수하고, 인출에 관계한 자들을 혹독하게 심문해 30여명이 거의 운명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 일은 다음해 1월 조보 인출이 고의성이 없다고 상주한 신하들의 간청에 못이겨 선조가 다 죽게 된 인출자를 먼 곳에 유배 보내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이 사건이 발생한 뒤 조보를 인쇄하자는 논의를 제기한 사람은 박제가(朴齊家)를 제외하곤 구한말까지 찾아볼 수 없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경연일기(經筵日記)’에서 “저들은 조보 인출을 통해 생계를 꾸려가고자 한 것뿐이고 사실 주동자는 없었다”며 선조의 대응을 과민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동시에 이를 허가해준 사헌부나 의정부 관리들이 책임 모면에 급급해 엉뚱한 상인들만 빈사상태로 몰아갔다고 개탄하였다.
조보를 간행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편리함이 이 사건으로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다. 실록에서는 조보를 필사하러 몰려든 사람들로 북새통이 된 승정원 뜰의 상황을 싣고 그들을 징치(懲治)하기 위한 명령이 하달된 사실을 적고 있다.
/안대회/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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