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날적이

안경을 벗었다.

by 만선생~ 2023. 11. 14.

 

고등학생 때부터 안경을 써오다 지난해 말 안경을 벗었다.
다초점 인공수정체 수술을 한 것이다.
기대만큼 시력이 좋아진 건 아니지만 안경을 쓰지 않아도 되니 좋긴 하다.

평생동안 써온 안경이라 무의식중 안경을 쓰며 했던 행동을 하곤 한다.
세수 뒤에 안경을 찾거나 거리를 걷다 안경이 없는 걸 깨닫고
불안감을 느끼는 등등이다.

안경은 얼만큼 한사람의 인상을 결정짓는 걸까?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현세 만화의 빌런인 마동탁은 안경을 써서 더욱 거만해 보인다.
정가네소사의 우리 외할아버지는 둥근 안경을 써 식민지시대의 인텔리로 보인다.

배금택 만화 영심이에서 영심이를 좋아하는 안경태는 안경을
써 소심한 모범생으로 보인다.
옛날 어른들은 여자가 안경을 쓴채 고개를 들고 다니면
버르장머리가 없다며 혀를 차기도 했다.

그렇다면 평생동안 안경을 써왔던 정용연과 안경을 벗은
정용연의 모습은 얼마나 다를까?
나는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결론은 나를 만난 그 누구도 안경을 벗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거다..
식구들조차 안경을 벗었단 사실을 몰랐다.
뜻밖의 결과에 당황한 나는 오랫만에 만난 친구에게 말했다.

"나 눈 수술해서 안경 벗었는데... "

녀석의 대답은 황당했다.

"너 안경 썼었냐?"

순간 나는 0이 되었다.
아무런 존재감이 없는 숫자 0...
오늘 내가 죽더라도 누가 부고소식을 전하지 않으면 녀석은
십년이 지나서도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갈테다.
순간 스무살 무렵 좋아했던 여자아이가 생각났다.
서른 중반이 되어 우연찮게 다시 만난 그 애는 공원을 거닐며 내게 말했다.
자기가 죽을 때 가장 많이 생각나는 사람이 나일 거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모른다.
비록 지금 당장 죽더라도 그 말 한마디로 인해 슬프지 않을 거 같았다.

나는 궁금했다.
만약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다시 그 애를 만난다면 그 애는 알아차릴까?
내가 안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걸.
스마트폰으로 글씨를 쓰다 보니 눈이 침침하다.
하여 눈을 감고 손으로 눈을 쓸어내린다.
안경을 벗지 않고 바로 쓸어내린다.
안경에 코가 눌리는 일도 없고 천으로 안경을 닦아 내릴 일도 없다.
그만큼 편해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존재감 없음을 다시 확인했다.
아니면 안경은 나를 결정짓는 요소에 전혀 속하지 않는 것이었든지.


2022년 5월 27일 ·

 

'날적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국 장관 단상  (1) 2023.11.14
용불용설 [用不用說]  (1) 2023.11.14
100권 사인  (0) 2023.11.12
두가지 꿈  (1) 2023.11.12
요새 노래  (0) 2023.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