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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단상

서운함

by 만선생~ 2025. 4. 16.

 

만화 그리는 두 살 위 형이 있다.
만나면 시시껄렁한 농담도 하고 밥도 먹고 산책도 하는 그야말로 막역한 사이다.
얼마 전엔 영화 "파묘"를 함께 보기도 했다.
형은 내가 컴퓨터에 문제가 생길 때 SOS를 신청하면 바로 해결해주는 능력자이기도 하다.
컴퓨터 뿐 아니라 생활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알려주기도 한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나는 형에게 내 차를 여러번 빌려주었다.
마누라를 빌려줄지언정 차는 빌려주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어차피 잘 타지도 않는 차 누가 탄들 어쩌겠는가!

형은 이른 나이 만화를 시작했다.
대본소 만화 시스템에서 차례를 밟아가며 데셍맨이 되었고 가정도 꾸렸다.
형은 스토리작가와 협업으로 신문 연재만화를 그렸다.
하지만 아쉽게 어떤 사정으로 연재는 중단되었고 이런 저런 부침을 겪는다.
형은 아직 자기 이름으로 된 책이 없다.
다들 한 번쯤 내보는 공모전에 작품을 내보지도 않았다.
다양성 만화같은 지원 사업도 관심밖이다.
한 후배가 다양성 만화에 응모를 한 번 해보라 권하면 대답이 가관이다.
작품을 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구구절절하게 설명을 하는 것이다.

만화를 그리면서 왜 작품을 꼭 해야는 하는지 말하는 사람은 봤어도 왜 작품을 하지
않아야 하는지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다.
나도 이해는 한다.
만화를 그린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고생이기 때문이다.
또 평가를 받는 것도 괴로운 일이다.
형은 생활이 안돼 만화 외 일들을 전전했다.
그렇다고 만화를 그릴 시간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본인이 의지만 가지고 있으면 충분히 만화를 그릴 수 있었다.
지금은 만화를 전혀 그리고 있지 않는 상태다.
나는 형에게 많이 서운하다.
이해는 할 수 있지만 정도가 심하다.

형은 내 작품에 대해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책이 나와 형에게 책을 줘도 형은 작품 이야기를 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만 했다.
방금 사인을 해서 준 책을 앞에 두고서도 그렇다.
형 마음이 편치 않으리란 걸 안다.
자신은 한 번도 내보지 못한 책을 후배가 냈을 때 축하의 말을 건네기가 쉽지 않을 테다.
축하의 말을 딱 한 번 듣기는 했다.
전작인 친정가는길을 줬을 땐 축하한다고 말을 하더라.
하지만 이후 작품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형은 단톡방 멤버다.
내가 단톡방에 "1592진주성" 출간 소식을 알렸을 때 후배들은 그날 바로 책을 주문했다.
나는 후배들이 고마웠다.

나 역시 단톡방 멤버 중 누구라도 책을 내면 바로 책을 주문할 것이다.
그날 형은 단톡방에 들어와있지 않았다.
며칠 뒤 단톡방을 보니 1이라는 숫자가 지워져 있었다.
형이 단톡방에 들어왔기에 1이란 숫자가 지워진 것이었다.
책이 나왔다는 내용을 안 볼 수가 없다.
이후 후배 아버님 장례식장에 차로 형과 다른 후배를 태우고 함께 이동했다.
왕복 세시간이 넘도록 나는 새로 출간된 책에 대해 한 번도 말하지 않았고 형도 책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굳이 내가 먼저 앞서 책에 대해 말할 순 없었다.
이해는 한다.
나라도 마음이 편치 않았을 거다.
그렇다고 시기와 질투를 느낄 꺼리는 아니다.
일 년에 한 두권씩 나오는 것도 아니고 몇 년에 한권 그리고 잘 팔리는 것도 아닌...
그에 대한 말한마디 해줄 수 없는 걸까?
나는 내 이름으로 나온 책들을 형에게 모두 저자 사인을 해 줬었다.
하지만 이번엔 애써 그러고 싶지가 않다.
역지사지로 나라면 어땠을까?
불편한 마음을 누르고 축하의 말을 건넸을 것 같다.
억지로라도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 같다.
동지란 슬픔을 함께 나누는 거다.
고통을 함께 나누어 짊어지는 거다.
기쁜 일이 있을 때 함께 기뻐해주는 거다.
대단찮은 성취에 입을 꾹다물고 있는 형에게 나는 많이 서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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