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꺽정 완독
벽초 홍명희가 쓴 임꺽정 (10권.사계절 출판사).
책이 배달된지 한달하고도 열엿새만에 다 읽었다.
읽는 속도가 워낙 느린 탓에 이제야 마지막 책장을 덮음.
덕분에 작업 시간 많이 뺏겼더란다. ㅠㅠ
기대했던 것만큼 흥미진진하진 않지만 읽어볼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임꺽정을 읽기 전의 나와 읽고난 뒤의 내가 달리 느껴지니 말이다.
우리 조상들의 생활 공간으로 깊숙히 들어가 살다나온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랄까?
이 책을 읽음으로서 나는 한국인으로서 더 진한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나는 세계인이기 앞서 한반도라는 공간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인이니말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궁금했다.
지은이는 어떻게 조선시대 사람들의 일상을 손금들여다보듯
상세히 묘사할 수 있었을까?
전통이 단절된 일제강점기, 더구나 한국문화를 말살하며 일본말을 강제하던
태평양전쟁 목전직하에.
타임머신을 타고 임꺽정이 살던 시대를 다녀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하지만 오류도 있었다.
조선후기 전래된 옥수수와 감자를 먹고 마찬가지로 병자호란
이후 생겨난 화냥년이라는 말이 쓰였던 것 말이다.
벽초 역시 모든 걸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자신이 살던 시대에서 구할 수 있는 자료를 모아 작업을
진행했을 뿐이다.
흔히들 이 소설을 일컬어 우리말의 보고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나오는 생면부지의
말들로 인해 얼을 차릴 수 없다.
정말 이런 말이 있었던가 싶어 어리둥절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분명 우리 조상들이 쓰던 말인데 왜 우리는 이토록 모르고 있을까?
일본식 한자와 영어를 무분별하게 받아쓰고 있기 때문 아닐까?
우리사회가 우리말을 살려쓰고자하는 노력을 좀 더 기울였다면 이처럼 낯설게
들리진 않았을테다.
소설속엔 지금 우리가 살려써야할 말들이 너무나 많았다.
현재를 버리고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죽어있는 말이 아닌 살아있는 말을 쓰자는 거다.
마치 막잡은 고기가 손에서 퍼떡이는 느낌...
소설 임꺽정에서 쓰이고 있는 우리말이었다.
그래서 한국어를 좀더 풍부하고 아름답게 쓰고자 하는 이들에게 임꺽정은 필독서다.
반드시 읽어볼 일이다.
읽기전과 읽은 후가 다를 것이다.
특히 이 소설이 내게 유용했던 건 지리에 대한 꼼꼼한 묘사였다.
소설의 무대가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한반도 전역을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들 대부분이 평생토록 자기가 살던 고을을 벗어나 보지 못하고
죽는 것과 달리 임꺽정과 그 무리들의 활동은 어느 한 지역에 머무르지 않는다.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조선팔도 전체가 활동 무대다.
그리하여 어디 어디 하면 '아~ 갖바치가 또 임꺽정이 머물렀던
그 곳'하며 바로 연상되는 것이다.
한양에 대한 묘사도 상세해 우리는 지금이라도 임꺽정 등장인물들이
걸었던 길을 따라 걸을 수 있다.
지난 백여년간 진행된 개발로 인해 적잖은 길이 사라졌지만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광화문과 청계광장 사이의 태평로를 걸으며 임꺽정 패들이 관군을 피해 내달리던
황토마루를 떠오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또한 청계천변을 걸으며 임꺽정의 여자들을 떠올릴 수 있으리라.
소설 임꺽정은 우리말의 보고인 한편 이야기가 풍부한 지리교과서인 것이다.
다만 안타까운 건 분단으로 인해 소설 후반부의 주활동무대인 북쪽을
가볼 수 없다는 것.
빌어마지 않는다.
하루 빨리 남북관계가 좋아지길 그래서 개성으로 가는 길이
뚫리고 평양까지 갈 수 있기를.
통일의 그날이 하루빨리 앞당겨지길.
그날이오면 맨먼저 꺽정이 산채가 있던 청석골을 찾으리라.
지나가는 이의 방물을 털던 탑고개를 찾으리라.
어쩌면 이후 나는 개성 봉산 평산 이천 평주 영변 등지를 다니며 임꺽정
주인공들을 만날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즐거운 일이다.
유명인의 권위에 기대 말하는 걸 싫어하지만 예외는 있다.
이 책의 가치를 알릴 수만 있다면.
바로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씨 이야기다.
90년대 중반 나의 문화유사답사기란 책으로 신드롬을 일으켰던 유홍준씨가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지식인의 서재" 에서 꼭 다시 보고 싶은 책으로 임꺽정을 꼽더라.
또 유명한 고전평론가 고미숙씨는 임꺽정을 읽고 책을
내기도 했다. (출판사 권유로 책을 쓰기 위해 세차례 완독했다 한다)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이 것 역시 읽어볼 생각이다.
내가 읽은 책을 다른 사람은 어떻게 읽었는지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니까.
홍명희 임꺽정은 황석영 장길산과 다르다.
양반사회를 뒤엎고 백성이 주인되는 세상을 위해 일어난 장길산과 달리
임꺽정은 지향점이 없다.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흉악한 도적일 뿐이다.
꺽정이와 그 친구들은 잘못된 세상을 뒤엎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재물이 필요해 봉물짐을 털고 관아를 습격한다.
관군이 서서히 목을 조여오지만 민은 꺽정이패를 돕기 위한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대의명분이 없는 꺽정이 패의 한계다.
의적이 아닌 화적 임꺽정.
작가는 무엇을 그리려 했을까?
민중의 정서다.
밑바닥에서 신음하지만 생명력을 잃지않은.
소설 임꺽정은 조선왕조실록 명종조의 몇 줄 안되는 기록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민담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장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미완성 이야기다.
끝이 없기에 아쉽지만 끝이 없기에 꺽정이패의 궤적을 추적할 수
있는 상상의 여지가 있다.
정치권력이 극도로 부패하고 지방관들의 가렴주구가 극에 달한 지점에서
일어난 꺽정의 봉기.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신분제 사회의 균열을 냈던 것만은 틀림없다.
2015.3.8
'책 리뷰 > 소설 일반 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상준 선생님이 쓰신 책과 번역하신 책 (2) | 2025.03.11 |
---|---|
소설가 김동인! (0) | 2025.03.09 |
줬으면 그만이지 (1) | 2025.03.01 |
원이 엄마 편지와 소설 <<능소화>> (0) | 2025.02.21 |
<<토닥토닥 쓰담쓰담>> 주홍수 (1) | 2025.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