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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단상30

지우개 당연히 갖추고 있어야 할 물건이 없어 당황할 때가 많다. 식칼없는 주방장을 상상할 수 있는가? 대패없는 대목장을 상상할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펜과 연필 잉크 만화용지를 가지고 있지 않는 만화가는 상상할 수 없다. 도구야말로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 말해주는 알파요 오메가인 것이다. 펜대 펜촉 연필 지우개 만화용지 잉크... 고백하자면 만화가로서 갖추어야 할 물건이 없을 때가 참 많다. 그만큼 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만화를 완전 포기하지 않는 한 도구는 일단 충분히 갖추어 놓고 있어야 한다. 언제 어느 때 의뢰가 들어와 작업을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만화가는 의뢰가 들어오지 않아도 기본적으로 자기 작업을 하고 있어야 한다.) 며칠 전부터 지우개가 하나밖.. 2024. 1. 17.
작업할 때가 가장 행복 작업도 관성의 법칙이 작용한다. 한번 필이 받으면 좀처럼 손을 놓을 수 없다. 쭉쭉 계속 해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 손을 놓아버리면 다시 필 받기가 힘들다. 그러니까 필 받을 때 최대한 작업을 해야 그나마 일정 정도의 분량을 채울 수 있는 거다. 오후 3시 을지로에 있는 치과 예약이 돼있다. 그런데 12시 무렵 필을 받기 시작하였다. 1시 쯤 집을 나서야는데 그러면 한시간 밖에 작업을 못한다. 물들어올 때 노저으란 말처럼 이럴 때 최대한 작업을 해야 그나마 작업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6시까지는 집중력을 유지하며 작업을 할 수 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확보하고 싶다. 하여 치과에 전화를 해 예약을 5시로 미룰 수 없냐고 물었다. 손님이 많은 시간이라 안된단다. "그럼 4시는.. 2023. 12. 30.
앞으로 얼마나 더 만화를 그릴 수 있을까? 입주자대표회의를 마치고 돌아와 동갑내기 친구와 한 시간 넘게 통화했다. 주로 학교 수업에 대한 이야기였다. 친구는 10년 째 학교 수업을 나가고 있다. 몇 년에 한 번꼴로 책도 내지만 수입의 대부분은 학교 수업을 통해 올리고 있어 친구로선 아주 중요한 일이다. 친구는 어쩌다 수업을 나가는 작가들과 만나면 말이 많아지곤 했다. 그렇잖아도 수다스러운데 더 수다스러웠다. 서로 정보도 교환하고 공감하며 박수를 치곤했다. 나는 그들 사이에 있으면 외토리가 되었다. 섬처럼 떨어져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수업을 한 번도 나간 적 없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작업 얘기를 해도 모자랄 판에 수업이야기만 해대니 화가 났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그만 좀 하란 말야. 지겹지도 않아.” 하지만 나는 .. 2023. 12. 22.
성의 모처럼 힘들게 완성한 원고를 선생님께 보여드리면 선생님은 원고를 대충 한번 넘겨보시면서 "스토리는 괜찮은데 그림이 모자란다"는 말씀을 하셨다. 어디가 어떤지 구체적인 평가를 받고 싶어하는 나로선 참으로 무안한 일이었다. 이후 선생님은 당신이 하고 싶으신 얘기만 계속 하셨고 나는 묵묵히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따름이었다. 선생님께 들고간 원고는 어디에도 쓰이지 못한 채 지금까지 책상 서랍에 조용히 잠들어 있다. 워낙 졸작이라 세상에 다시 나올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이어주는 건 성의라고 생각한다. 성의있게 편지, 성의있게 싼 선물포장, 성의있게 차린 밥상... 여행지에서 지나가는 행인에게 사진을 부탁했는데 사진을 성의있게 찍어주면 고마운 생각이 든다. 성의란 무엇일까? 마음을 다하.. 2023. 12. 18.
만화 단상 넷 1 진득하게 자기 때를 기다리는 사람은 적고 알량한 밑천을 드러내지 못해 안달인 사람은 너무나 많다. 2 만화가에게 크로키는 양날의 칼이다. 안하면 그림이 정형화되기 쉽고 너무 열심히 하면 창작에 대한 갈증이 해소돼 만화를 안그리게 된다. 글쟁이도 마찬가지. 페북글을 너무 열심히 쓰다보면 그자체로 갈증이 풀려 정작 써야할 글은 안쓰거나 소홀히하게 된다. 3 친한형이 유머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야 나올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지식의 유무와 상관없이. 난 형의 말이 넌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하단 말로 들렸다. 4 간간이 톡으로 말걸어오던 후배가 이젠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새로 이성친구가 생긴 건가? 아니면 나란 사람에 실망한건가? 내 글에 좋아요를 누르지 않던 후배가 다른 이의 글에 좋아요를 눌.. 2023. 12. 17.
강감찬 장군 2023년 말, 고려 특수가 일고 있다. KBS 대하 드라마 이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시청자들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때 맞춰 원작소설인 "고려거란전쟁"(길승수 지음)이 재출간되어 세일즈포인트가 가파르게 상승 중이다. 더하여 수많은 유튜버들이 방송에서 "고려 거란 전쟁"을 이야기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강감찬 장군에 대한 조명도 활발하다. 강감찬 장군은 우리 큰형 인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강감찬 장군을 다룬 어린이 위인전에서 제방을 터트려 거란군을 몰살하는 장면은 어린 형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 이후 형은 군인이 되고자했다. 사관학교에 들어가면 입학금을 내지 않아도 되니 다른 학과는 쳐다볼 이유가. 없었다 사관학교에 원서를 넣은 형. 하지만 형은 탈락했다. 연좌제 때.. 2023. 12. 10.
지자체 의뢰 그림 지자체에서 그림을 의뢰받았는데 거절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예상대로 재미가 너무나 없었기 때문. 이런저런 내 만화 작업을 핑게로 기한을 미루고 미루었다. 원고 작업이 왜 이리도 재밌는 것인지 내가 쓴 스토리와 그림에 감동했다. 당장 돈으로 환원되진 않지만 원고작업을 하는 내내 행복했다. 하지만 지자체 그림을 마냥 미룰 수는 없었다. 아... 한 숨이 푹푹나온다. 동화책 삽화를 그릴 때도 그랬었지만 역시 가슴이 뛰지 않는다. 의뢰용 그림의 한계다. 내가 기획한 것을 쓰고 그릴 때 비로소 심장이 뛰는 것이다. 그렇다고 의뢰용 그림을 대충 그리는 건 아니어서 신경을 쓰지 않을 수없다. 그러니 더 고생스러운 거다. 어제 시에 아이디어 스케치를 넘겼더니 수정사항이 몇 개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내 만화 원고 작.. 2023. 12. 2.
선택 두 사람의 만화가가 있다. 한 사람은 재미가 좀 떨어지지만 마감을 칼같이 잘 지켰다. 아니 마감 며칠 전 원고를 보내와 편집자를 놀라게 했다. 이런 만화가만 있다면 편집자 생활도 괜찮을텐데... 또 한사람의 만화가는 마감날짜가 며칠이나 지난 다음 원고를 보내왔다. 아무리 원고마감을 독촉해도 아직 덜 됐다고 태연하게 대답하는 만화가... 화가났다. 당신 때문에 일정이 얼마나 차질을 빚었는데... 편집자는 차마 앞에선 못하고 뒤로 쌍욕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잡지가 나오고 앙케이트 조사를 했다. 마감을 칼같이 지킨 만화가의 작품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동료편집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마감날짜를 며칠이나 어긴 만화가의 작품엔 반응이 뜨거웠다. 실린 작풍 중에 가장 재밌다는 거였다. 다음호를 준비하는 편집자의.. 2023. 12. 2.
돌아오라 용연아 87년 작업실 형이 민중잡지 "청춘"에 정화진 원작의 단편만화 '쇳물처럼'을 발표하였다. 작업과정을 내내 옆에서 지켜보았는데 형은 기억에 남을만한 컷을 하나 그렸다. 구인광고게시판을 그리면서 내 이름을 집어넣은 것이다. 돌아오라 용연아 모든걸 용서하마 962-8967 덕분에 당시 우리집 전화번호가 962 8967 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나저나 용연이는 언제 돌아온겨? 2023. 11.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