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에세이187

권숯돌 작가를 떠나 보내며 무슨 말부터 해야 될지를 몰라 썼다 지우기를 반복합니다.우리들의 소중한 벗 권유선.또 다른 이름은 권내영이었고 필명은 권숯돌이었습니다.숯돌은 어린 시절 이마가 까매서 어른들이 붙여준 이름이라네요.권샘은 1972년 6월 13일 부산에서 태어나 2024년1월 16일 전라도 강진에서 잠들었습니다.뒤늦게 소식을 들은 나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세상을 떠난 지 한 달 반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권샘이 세상에없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권샘은 왜 우리 곁을 그리도 황망하게 떠나가야 했을까요?야속하고 또 야속합니다.지금이라도 웃는 얼굴로 샘~ 하며 반길 것 같은데 말입니다.권샘을 만난 우리는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겠지요.권샘과 함께 하는 산책은 얼마나 즐거울까요?얼마 전 이희.. 2024. 3. 1.
권숯돌 작가의 선물 어린시절 아버지는 어디선가 고양이 한마리를 가져오셨다.줄무늬 고양이였다.나는 고양이를 매우 사랑하여 녀석을 늘 품에 안고 자곤 하였다.고양이의 따뜻한 체온은 물론 심장에서 나는 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그르렁대는 그 소리.1979년 12월 22일.아버지는 거뭉이와 함께 고양이를 이웃 마을에 팔았다.그리고 그 날 우리 가족은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 서울행 완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선 서울행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우리가 자리를 잡은 곳은 청량리 산동네였다.나와 동생은 유리창에 성애가 가득 낀 단칸방에서 거뭉이와 고양이를생각하며 울었다.2018년. 나는 일본에서 살던 권숯돌 작가로부터몇 개의 도예 작품을 선물로 받았다.도자기 공방에 다니며 본인이 직접 구워 만든 것이라.. 2024. 3. 1.
권숯돌 작가가 보내준 권숯돌 작가는 일본에 살며 내가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공수해주었다.그 가운데 하나가 한국에선 생산이 중단된 만화용 잉크와 펜촉이다.예전엔 파일로트 제도용 잉크를 썼으나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지 어느날자취를 감추었다.펜촉도 마찬가지다.할 수없이 수입산을 써야만 했는데 고맙게도 권숯돌작가가 한국 오는길에 이를 전해주었다.이후 펜촉은 옥션에서 일본산 니코 펜촉을 100개 단위로 사서 썼는데잉크가 문제였다.마침 권숯돌 작가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않아 떨어지고 만 것이다.할 수없이 옥션에 들어가 네델란드산 잉크를 주문하였다.(만년필 잉크는 사용불가다.)한 때는 파일로트 제도용 잉크를 대신하여 서예용 먹물을 써보았다.하지만 점성이 없어 펜촉에 먹물을 머금지 못하고 바로 흘러내려 원고를 망치기 일수였다.십대 시절.. 2024. 3. 1.
자리끼 조두진 작가의 소설 《능소화》를 읽다보니 `자리끼`란 말이 나온다. 처음듣는 말이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밤에 자다가 깨었을 때 마시기 위해 잠자리의 머리맡에 준비하여 두는 물'이라고 나온다. 연관 검색으로 부부관계를 할 때 자리끼를 놔두면 좋단다. 그 외에도 자리끼를 놔두면 건강에 좋다는 말이 줄줄이 딸려나온다. 자리끼 어원도 나온다. 먹을 것이 부족한 그 옛날 잠자리에서 시장기를 달래기 위해 마셨던 물인데 자리와 끼니를 합한 말이라 한다. 돌아보면 머리맡에 물을 두고 잠든 적이 없다. 가난하게 살았지만 그렇다고 끼니를 거르진 않았단 이야기다. 현대 사회에 태어난 덕이다. 아래는 고마운 댓글들 박상률 우리 어려서 늘 쓰던 말. 밤에 잘 때 머리맡엔 당연히 자리끼! 곽작가 포카리스웨트 겉 라벨을 보면 .. 2024. 2. 28.
이놈 정신 머리하고는 며칠 전 이희재 선생님 내외 분을 만나 나의 정신머리 없음에 대해 말했다. 가장 먼저 말한 것은 여권 분실이다. 2003년 중국 광쪼우에 있는 작은 형 회사에 갔을 때 여권을 잃어버린 것이다. 아마도 버스로 이동 중 뒷주머니에서 빠진 듯하다. 할 수없이 광조우 한국영사관에 가 임시 여권을 발급받았다. 이 때 임시 여권 발급받기 의해 사진관에 가 사진을 찍었다. 쓰지 않아도 될 돈을 쓴 것이다. 홍콩을 경유해 돌아올 때 공항 직원이 임시 여권을 보더니 의심스런 눈초리로 뭐라뭐라 하였다. 영어를 알아들을 수 없는 나는 "아엠 미스테이크"란 말만 반복했다. 무사히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으나 나의 주의력 없음을 자책했다. 다신 이러지 말아야지... 암..암... 지갑도 자주 잃어버렸다. 택시에 두고 내리.. 2024. 2. 19.
권숯돌 작가의 책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큰 충격을 받지않았다.이미 돌아가실 걸 예상하고 있었으므로.헌데 동료인 권숯돌 작가는 다르다.너무나 뜻밖이었다.왜이리 황망히 떠나야 하는지 믿기지가 않았다.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한 것은 마흔 무렵이다.이전까지 죽음은 추상적일 수밖에 없었다.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더 많았다.하지만 생물은 필멸한다.지구에 생물이 생겨난 이래 이를 비껴나간 존재는 없었다.죽음 뒤엔 무엇이 있을까?없었다.그리하여 언젠가 찾아올 죽음을 생각하면 땅이 꺼지는 기분이 들곤 하였다.그만큼 소멸은 두려웠고 그와 비례해 삶에 대한 애착도 커져만 갔다.오십대 중반을 넘어선 지금도 나는 죽음이 두렵다.할수만 있다면 언젠가 찾아올 죽음을 최대한 늦추고 싶다.죽은 이는 말이 없다.아무리 소리쳐 불러보아.. 2024. 2. 19.
권숯돌 작가가 떠난 뒤 아파트단지 안을 걸어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차에 숙북히 쌓인 눈을 한 웅큼 움켜쥐었다.물기를 머금어 뽀드득 소리가 났다.손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이 좋았다.또다시 세상을 떠난 권숯돌 작가가 생각났다.삶이란 무엇인가?수북히 쌓인 눈을 바라보며 아름답다고 느끼는 거다.눈을 움켜쥐었을 때 상쾌함을 느끼는 거다.그런 거다.나와 가깝게 지내던 이가 눈을 움켜쥘 수 없다고 생각하니 슬펐다.말도 할 수없고 소리도 들을 수 없고 읽거나 쓸 수도 없는 완전한 무의 세계!출판사에서 권작가와 함께 작업한 책 표지 디자인을 보내왔다.8차 수정본이었다.마음에 들었다.마침 우리집에 놀러온 동네형에게 표지를 보여주니 바로 좋다는 말을 하였다.고급지단다.집에 있는 다른 책들과 비교하며 참 잘된 디자인이라고 했다.동네형이 돌아간 뒤.. 2024. 2. 19.
권숯돌 작가 북한산 그림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권숯돌 작가님과는 사흘에 걸쳐 북한산 일주를 한 적 있습니다.하루는 권작가님 사촌 동생과 동행을 하기도 하고요.산행을 하며 적지 않은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덕분에 권작가님 인생 행로를 소상히 알  수 있었지요.권작가님은 일본 생활을 하며 고국강산이 그립다는 말을 많이 하였습니다.가족들이 아무리 배려를 많이 한다 해도 근원적 그리움은 떨쳐버릴 수 없었나봅니다.그리하여 틈날 때마다 한국을 찾곤 하였지요.특히 산에 오르는 걸 좋아했습니다.저는 권작가님이 북한산을 최대한 많이 느끼게해줘야겠다는 사명감에 불타 안내를 했습니다.산을 잘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수십번 오른 산이라 안내인을 자처했던 것입니다.산행 이틀째. 사자능선을 바라보며 비봉에 오를 때입니다.바위에 쉬고 있던 권작가님은 문득.. 2024. 2. 19.
권숯돌 작가 이야기 이어쓰는 권숯돌 작가 이야기권숯돌 작가가 일본 유학 시절을 이야기 한 적 있다.정확하진 않지만 기억을 더듬어보면 이렇다.90년대 대학을 졸업하고 약 2년동안 KBS 방송 작가로 활동하였다.유학을 결심한 것은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였다.교사였던 아버지는 도박에 미쳐 가정을 돌보지 않았다.나아가 빚을 떠 안겼다.가정 내 불화는 말할 수 없이 컸다.처음엔 영어권 나라로 유학을 떠날 생각이었으나이런 저런 사정이 겹쳐 일본으로 방향을 정했다.2년 과정인 랭귀지 스쿨을 1년만에 마치고 들어간 곳이 나고야 대학대학원이었다.유아심리학과라고 했다.선동열이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나고야의 수호신이라 불리며 활동하던 무렵이다.대학을 다니지 않은 나는 대학사회를 모른다.그럼에도 권숯돌 작가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는 놀라웠다.대.. 2024. 2. 19.